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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제2차 미소공위에서 한국전쟁전야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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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등록일
2005.11.10
최종 저작일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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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47년 3월, 미국의 대통령인 트루먼이 의회에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인 트루먼독트린이 선언되었다. 이 원칙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의하여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 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이것은 결국 미국 행정부가 미소공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7년 5월 21일 서울에서 제 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다. 47년 6월초에는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였던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들 구(舊)국민당 세력이 김구등의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성사를 위해 한독당을 탈당하였다. 이들은 “우리민족의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하여는 기동성있는 총명·과감한 발전적 투쟁을 요한다”면서 미소공위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6월 11일에는 미소공위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모스크바 결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조선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를 고수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제안을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를 공위에 재출하도록 되어 있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좌파진영과 중도파 진영은 이 성명을 반겼지만, 반탁 진영 내부에서는 공위 협의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였다.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한독당 내부에서도 일부 참가를 주장하고 탈당하는 계열이 생겨났으며 이에 이승만. 김구 결국 불참을 선언하게 되었다. 찬탁진영에서는 공위 재개를 환영하였으며, 앞으로 수립될 정부는 인민위원회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미소공위에서도 미소간에는 1차와 마찬가지로 협의단체의 자격문제로 인해 갈등이 노출되었다. 소련측은 비정치적 조직, 비사회적 조직, 지방차원의 조직, 반탁위원회에 소속된 조직은 참여를 배제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것은 반소세력의 공위 참석 배제 의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측은 3상회의 당시 사회단체에 대한 정의가 내려진 바 없었고, 의사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단지 회원 1천명 미만의 단체, 적극적인 삼상회의 반대 단체의 참여 배제만을 동의하였고, 협의단체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양보 없이 계속되다가 7월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미소공위의 결렬이 가시화되었다. 7월 16일 미국대표는 소련이 미소공위 협정을 사실상 무효화한다고 비난하였고, 소련 역시 미국대표를 비난하였다.
결국 1947년 7월 27일 미국대표는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다"고 새로운 주장을 하였고 소련 역시 3상회의 및 미소공위 반대단체를 제외하고 남북한 동수의 입법부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함으로 양측 모두 상대의 제안을 거부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목차

1. 미소공위 개회와 결렬

2. 좌우합작운동과 그 좌절

3. 제주 4.3 항쟁

4. 김구, 김규식의 방북과 5.10 단독선거

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6. 여순사건

7. 김구 암살사건

8. 6.25 전야

본문내용

1947년 3월, 미국의 대통령인 트루먼이 의회에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인 트루먼독트린이 선언되었다. 이 원칙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의하여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 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이것은 결국 미국 행정부가 미소공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7년 5월 21일 서울에서 제 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다. 47년 6월초에는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였던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들 구(舊)국민당 세력이 김구등의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성사를 위해 한독당을 탈당하였다. 이들은 “우리민족의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하여는 기동성있는 총명·과감한 발전적 투쟁을 요한다”면서 미소공위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6월 11일에는 미소공위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모스크바 결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조선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를 고수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제안을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를 공위에 재출하도록 되어 있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좌파진영과 중도파 진영은 이 성명을 반겼지만, 반탁 진영 내부에서는 공위 협의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였다.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한독당 내부에서도 일부 참가를 주장하고 탈당하는 계열이 생겨났으며 이에 이승만. 김구 결국 불참을 선언하게 되었다. 찬탁진영에서는 공위 재개를 환영하였으며, 앞으로 수립될 정부는 인민위원회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네이버백과사전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강만길,『한국민족운동사론』,한길사
양성철,『북한정치연구』,박영사
변형윤,『분단시대와 한국사회』,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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