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샤를마뉴
- 최초 등록일
- 2021.01.09
- 최종 저작일
-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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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예견된 황제 (피핀)
2. 샤를마뉴
3. 업적
4. 문화부흥(카롤링거 르네상스)
5. 의의
본문내용
1. 예견된 황제(피핀의 도움)
푸아티에 전투
사실 샤를마뉴가 이룩한 업적의 많은 부분은 그의 즉위 이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중 732년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샤를(카를) 마르텔이 침공해 들어오는 사라센 군대를 푸아티에 전투에서 막아내 왕조의 지배권이 굉장히 높아지게 된다. 사라센은 100년전 프랑크 왕국의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이들을 막아냄으로써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피핀
714~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
프랑크 왕국의 궁재(747~751). 프랑크 왕국의 왕(751~768). 별칭은 단신왕(Pippin der Kurze/Pepin le Bref).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이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서 성유식을 받았다.
피핀이 왕일 당시 교황은 종교 정책상의 심각한 입장차이,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피핀은 재빠르게 여러차례 원정을 통해 롬바르드 족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교황의 지배권을 공고히 함은 물론 신임을 얻었고, 피핀과 두 아들에게 세례를 함으로써 로마의 귀족이라고 선포했다.
재위 중 그는 프랑크 왕국을 결속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를 자신의 보호하에 둠은 물론, 사라센을 축출하고 작센족의 침입 마저 봉쇄했다. 그의 사후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이 죽고 나자, 당시 29세였던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단독왕이 되었고, 이미 그는 서유럽 최강의 지배자 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