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20.04.08
- 최종 저작일
- 2020.04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이용하시는 한글프로그램 버전이 낮은 경우에는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한글 뷰어 프로그램 또는 상위버전 으로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에 대하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문화대혁명
1. 발생배경
① 마오쩌둥(모택동)의 사상과 문화대혁명
② 정치투쟁으로서의 문화대혁명
2. 문화대혁명의 진행과정
① 문화대혁명의 발발
② 홍위병의 등장
③ 군의 개입
④ 문화대혁명의 종결
3.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① ‘역사결의’에서 내리고 있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ㄱ. 계속적 혁명론의 오류
ㄴ. 존재하지 않는 자산계급 사령부
ㄷ. 혁명 아닌 혁명
② 종결평가
Ⅲ. 천안문 사태
1. 천안문 사태의 원인
① 경제개혁을 따르지 못한 정치의 보수성
② 개혁개방이 낳은 분배구조의 불평등
③ 관료의 부패
④소외된 지식인 계층
2. 천안문 사태의 진행과정
3. 강경 진압의 배경
4. 천안문 사태의 결과와 영향
① 학생과 지식인들의 문제
② 중국정부에 끼친 영향
③ 천안문 사태의 평가
본문내용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1840년부터 시작된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가까이로는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멀리 청 왕조 및 그 이후 군벌의 봉건주의 통치와 가까이로는 국민당 관료자본주의 통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독립과 통일을 쟁취한 민족민주혁명의 성격을 가진다.
중국은 1950년대 초중반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을 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 이래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희망찬 시대였다. 하지만 1958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맞물려 겹친 3년의 자연재해는 이후 1960년대 초반의 반수정주의 운동과 함께 회복하기 힘든 경제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1966년 발발하여 그 후 10년 동안 모든 생산 활동이 정지되고, 파괴와 비난은 미덕이 되었으며 혁명의 대상을 찾기 위해 전 인민은 조석지간에 정치학습에 매달려야 했고, 독립의 영웅이자 주석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신격화되어 갔다. 또한 한편으로 문화대혁명 사상인 마오쩌둥 사상(마오이즘)은 좌파 지식인들의 새로운 돌파구 역할을 하면서 전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마오이즘은 사회변혁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으며, 문화대혁명에서 보여준 젊은 세대들의 반향은 사회의 기존세력과 기득권을 파괴하는 열정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대혁명은 많은 병폐를 남겼으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왕훙원(王洪文)의 4인방이 체포된 뒤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새로이 들어선 ‘덩샤오핑(鄧小平)’ 정부는 지금까지 지켜오던 폐쇄의 장막을 거두어들이고 세계의 무대로 나섰다. 문화대혁명에 의해 파괴되고 정지된 정상적인 행정과 당의 기구를 복원시키고, 새로운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체제를 성립하는, 한편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정체되었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체구를 세계시장에 편입시켜 눈부시게 발전한 서구의 과학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소위 개혁, 개방정책의 시대가 펼쳐나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