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彌勒寺址 西塔 舍利莊嚴具 出土 現況
Ⅲ. 彌勒寺址 西塔 舍利莊嚴具 樣式
Ⅳ. 彌勒寺址 舍利奉安記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 우리나라의 탑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三國遺事』의 기록이나 요동성총 내부에 그려진 요동성도에 다층의 목조건물이 남아 있어 불교 도입 초기 고구려에 세워진 탑은 인도탑과 중국탑이 함께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장법 또한 인도의 것을 수용한 중국 사리장법의 영향을 받아 인도와 중국에서 제작되었던 사리용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계승하였다.
백제의 여타 석탑 및 사지에서도 사리장엄은 출토되었으나, 왕흥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리장엄 일체를 완전히 갖춘 채 발견된 것은 없고 그 중 일부만 발견되어 동시대 사리장엄의 완전한 실체를 이해하기에 부족하다. 2009년도 1월 14일 백제 7세기 武王대 건립된 익산 彌勒寺址 西塔의 석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를 통해 7세기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와 백제와 동아시아의 교류현황을 이해하고, 사리봉안기를 통해서 미륵사지 창건 목적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Ⅱ.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 출토 현황
미륵사지는 1탑 1금당을 3곳에 나란히 배치한 삼원병치의 가람구조로 삼국시대나 그 이후의 가람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배치구조이다.(도 1) 삼원병치 가람의 발생은 미륵신앙의 내용을 구상화한 것으로 설명되어지며, 이는 백제시대 가람배치의 전통성과 용화회상의 사상성 그리고 가람조성에 있어 지형과의 조화라고 하는 관점에서 백제만의 독자적인 배치양식이라 할 수 있다.
서탑의 해체과정에서 백제시대의 창건된 석탑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축된 석탑임이 밝혀진 바 있다. 석탑이 개축된 시기는 여러 정황상 고려후기나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석탑이 일부 지반까지 정비된 때는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양각운문청자 편을 통해 12세기 중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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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현,오늘 우리에게 사리신앙은 어떤 의미인가 - 새로 발견된 미륵사지 사리장엄, 불사리를 만나며, 불교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