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7월 혁명213
- 최초 등록일
- 2017.11.30
- 최종 저작일
-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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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7월혁명의 배경
(1) 빈회의
(2) 왕정복고
(3) 프랑스 자유주의
(4) 프랑스 낭만주의
2. 7월혁명의 원인
(1) 혁명 직전의 경제 위기
(2) 자유주의의 확대
(3) 샤를 10세의 반동정치
3. 7월혁명의 전개
Ⅲ. 결론
1. 결과
(1) 프랑스 내부결과
(2) 외부
(3) 주변강대국의 입장
2. 한계점
3.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1830년의 혁명은 하나의 전환점을 의미하였다. 프랑스의 1830년은 ‘혁명의 해’로써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과 왕권신수설이 궁극적으로 종말하는 시기였고 서유럽에서는 유럽 노동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정치적인 힘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시민에게 옮겨지는 역사적 과정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또한 루이 필리프를 프랑스인들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프랑스 민중의 혁명은 유럽차원의 전쟁을 이끌어 내었고 당시까지 거듭 실패를 거듭했던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프랑스의 발전모델을 따르게 되었다. 즉, 1830년의 혁명이 유럽에 미친 영향을 통해 이때부터 정치적 지배에 관한 서구의 발전 모델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는 프랑스 7월 혁명이 프랑스 내 정치 및 유럽사회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7월 혁명을 전후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어땠으며 7월 혁명이 프랑스 문화사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7월혁명의 배경
(1) 빈회의
나폴레옹 패망이후에 유럽의 전후처리와 프랑스혁명 이전 질서회복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이 회의가 빈회의이다. 승전국들은 메테르니히의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원칙에 찬성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영토문제 등에서는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타도에 공헌한 정도를 감안하고 한 쪽에서 양보하면 다른 쪽에서 그 댓가를 보상한다는 보상주의 원칙이 나타났다. 이런 식의 세력균형원칙이 재확인되었고, 이의 시행은 주로 영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영국은 해양으로의 지속적인 진출을 꾀하면서 대륙에서 강한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였기 때문에 세력균형을 주도적으로 해 나갔고, 이는 주로 다음에 나올 보상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은 세력균형의 방법으로 분할체제를 주장하였고, 이는 영토의 할양이나 교환을 그 수단으로 하는 것으로, 빈 회의에서는 주로 프랑스가 점령했던 영토를 어떻게 분할하느냐는 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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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뒤프, 박단 역, 《프랑스 사회사》, 동문선,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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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희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의 원인에 대한 검토》, 논문, 1999
최원희 역《원치않은 혁명 1848》푸른역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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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국제정치사》, 일신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