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류인석의 국내의병활동
- 최초 등록일
- 2016.05.01
- 최종 저작일
- 2015.06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5,000원
* 본 문서는 한글 2005 이상 버전에서 작성된 문서입니다.
한글 2002 이하 프로그램에서는 열어볼 수 없으니, 한글 뷰어프로그램(한글 2005 이상)을 설치하신 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역사교육과 A+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류인석 의병의 결성과정
Ⅲ. 류인석의 의진단속과 창의이념
Ⅳ. 류인석의병의 충주성 점령
Ⅴ. 류인석의병과 일본군수비대와의 전투
Ⅵ. 류인석의병의 해산거부 몇 북상 결행
Ⅶ. 나가는 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고종이 유폐되고 친일개화파와 대원군의 연립정권에 의한 갑오경장이 단행되었다. 개항 후부터 왜양일체론에 따라 일본을 서양오랑캐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재야의 척사유립들 가운데 일부 강경파 인사들이 조선의 일본화를 획책하는 친일 개화파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고자 의병봉기를 모색하였다. 갑오경장 직후부터 추진된 그들의 거의노력은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어 재야유림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월 재야유림들은 조선선비들의 전통복장인 넓은 소매를 서양식의 좁은 소매로 바꾸려는 친일개화파의 복제개혁에 반발해 거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창의노력은 정례적인 유교세미나인 강회를 통해 의병봉기로 수렴되어 나갔다. 그러다가 1895년 11월 조선인들이 중화와 이적, 양반과 상민을 구분 짓는 척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반포되자 재야유림들은 직접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이미 변복령의 반포 이후에 단발령이 조만간 반포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재야유림들은 분개한 민중들과 합세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단발령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은 반일, 반개화를 그들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친일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동조하며 단발을 결행한 이속들과 친일관료들을 처단하고, 일본의 전신선을 절단하고, 지방의 요지에 설치된 관찰부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아관파천 후 고종의 의병선유조칙이 내려오기 전까지 친일관군과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이때 봉기한 항일의병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집단은 류인석 의병이다. 전성기에 군사 수가 1만여 명에 달했고 충주성을 점령할 정도로 성세를 펼친 류인석 의병은 규모, 전력, 참여세력, 전투양상, 영향력 등의 측면에서 을미의병을 대표하는 연합의진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