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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촌(後村) 신성(申晟)의 생애와 「금보신증가령」 (Shin Seong and Geumbosinjeunggar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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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7.09 최종저작일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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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촌(後村) 신성(申晟)의 생애와 「금보신증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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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 중기 음악 문화와 악보 연구의 귀중한 자료
    • 🕰️ 병자호란 이후 한국 음악사의 중요한 변천 과정 이해
    • 📚 신성의 개인적 삶과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학술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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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국악학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음악연구 / 52권 / 271 ~ 297페이지
    · 저자명 : 최선아

    초록

    본고는 조선 중기 장악원의 악관(樂官)이었던 신성(申晟, 1623~1680)에 관한 자료들을 가능한 폭 넓게 수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정리하는 한편, 그가 남긴 금보를 다시 살펴보면서 그의 음악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신성의 호는 후촌(後村)이며, 인조․효종․현종․숙종 연간을 살았던 문인으로 벼슬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일생을 강호(江湖)를 유랑하거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하에 있으면서 당대의 빼어난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며 주자학을 연구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신성은 그의 문인 및 처가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분쟁하며 갈등하는 현장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성은 14세에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형수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 그의 아버지 신익륭(申翊隆)은 벼슬을 버렸으며, 형 신만(申㬅)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분노를 품으며 방랑을 하였다. 신성 역시 아버지와 형을 따라 강호를 방랑하였다. 효종 9년(1658)에 조정에서 북벌론이 대두되자 신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따라 북벌 계책을 함께 세웠다. 이즈음 신성은 형의 명을 따라서 느지막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청산(靑山)의 현감(縣監)을 비롯하여 삼군(三郡)을 역임하였고, 평시서(平市署)의 영(令)을 지냈고, 장악원(掌樂院)의 악관이 되었다. 당시의 장악원에서는 새로이 복각된 「악학궤범」에 관심이 쏠렸다. 신성의 고조부인 신영(申瑛)은 성균관에서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악정(樂正, 정4품)이었고, 종조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역시 장악원 정(正)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음률을 잘 아는 집안에서 자랐던 신성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스무 살 때는 이미 거문고를 탈 줄 알았다. 따라서 당시의 신성도 자연스럽게 「악학궤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신성은 홍천의 현감을 지내면서는 「금보신증가령(琴譜新證假令)」을 완성하는데, 서문에 해당하는 ‘금보신증가령’은 장악원 악관 시절에 살펴본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악보인 ‘신증금보(新證琴譜)’는 여러 집안에 소장된 금보를 살펴보고 그 결함을 보완하는 동시에 쇠세(衰世)에 숭상하는 비속한 음악을 정화하고자 죽기 직전까지 다듬고 고쳐서 완성하였다. 결국 신성은 음률을 사랑했던 마음과 악보라는 문화적 유산을 사랑하는 자식과 손자에게 남기고 떠날 수 있었다. 오늘날 그가 남긴 악보는 병자호란 이후 향악곡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악보로 평가되고 있다.

    영어초록

    In this paper, the results of fundamental study on Shin Seong(申晟) (Shin Seong’s pen name is Hu Chon(後村)), one of official musicians of Jangakwon(掌樂院) in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are presented. Shin Seong was a civil official living in the concatenated regime of Injo(仁祖), Hyojong(孝宗), Hyeonjong(顯宗), and Sukjong(肅宗), who devoted his life to studying Neo-Confucianism under Kim Jip(金集) (Kim Jip’s pen name is Sin Dok Jae(愼獨齋)) retreating into the general public before securing the government position. While Shin Seong vigorously communicated with contemporary celebrities of Neo-Confucianism, he suffered the party strife between his wife's family and pupils representing Noron(老論) and Soron(少論), respectively.
    Shin Seong lost his mother and sister in law during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when he was 14. Afterward, his father (Shin Ik-ryung(申翊隆)) resigned from the government service, and his brother (Shin Man(申㬅)) set out on a wandering journey in a fit of passion. In the 9th year of Hyojong (1658), Shin Seong cooperated with Song Si-yeol(宋時烈) in planning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rised as a revenge of the Manchu war of 1636, around then Shin Seong started his government service late following the suggestion of his brother. He successively held various posts such as the lord of Cheongsan(靑山), Pyeongsiseo(平市署), and became an official musician of Jangakwon where the newly restored Akhakgwebeom(樂學軌範) was among the greatest concern at that time. Shin Seong was talented in music and was skillful in playing Geomungo(玄琴) at an early age of 20, the origin of which could be explained by his family history such that Shin Young(申瑛), his great-great-grand father, held the position of Akjeong(樂正) (4th rand in civil officials) who studied the theory of music in Seonggyungwan(成均館), and Shin Heum(申欽) (Shin Heum’s pen name is Sang Chon(象村)), his great-grand father, was also a government official of Jangakwon. Therefore, it is natural that Shin Seong was also interested in studying Akhakgwebeom.
    Shin Seong completed Geumbosinjeunggaryeong(琴譜新證假令) while working as the lord of Hongcheon(洪川), in which the preface, ‘Geumbosinjeunggaryeong(琴譜新證假令)’, was based on Akhakgwebeom. The score, ‘Sinjeunggeumbo(新證琴譜)’, was a collection of ‘Geumbo(琴譜)’ from many other families completed near his end, which passed through his careful revision for purifying the music of the impoverished world contaminated by vulgarity. These became his legacy containing the devoted love for the music and the score, which is rated today as a highly precious bequest showing the evolution of Korean music(鄕樂)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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