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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 대한민국의 3․1절과 국민 생산 (the Republic of Korea's National March-First Anniversary and Its Making of R.O.K. Kukmin (國民) before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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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6.26 최종저작일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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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 대한민국의 3․1절과 국민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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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 수록지 정보 : 역사학연구 / 38호 / 351 ~ 388페이지
    · 저자명 : 임종명

    초록

    해방 직후 소환된 3․1은 ‘자기희생의 초(超)지역․계급․종교․신앙․종파․주의․사상적, 통일적 민족항쟁’으로 표상된다. 이와 같은 표상 속에서 3․1은 개별․개인적 것 모두 “희생”된 민족항쟁이었다. 이와 같이 희생이 강조되면서 ‘자기희생적 3․1상(像)’이 구성된다. ‘자기희생적 3․1상(像)’의 구성은 탈(脫)식민시기 한국인의 자기희생, 즉 개개의 정치 이념․주의․사상, 심지어 가족과 개인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유관순(柳寬順)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표상작업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이와 같은 표상작업은 “우리 동포, 특히 젊은 여성 사이에 나라를 위하여 죽고저 하는 거룩한 정신”, 또는 애국적 희생정신을 “크게 일으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관순의 희생은, 또 유관순의 죽음으로 상징화된 3․1의 폭력적 종식은 유관순 개인의 천국에서의 새로운 삶과 한민족의 민족적 생명을 낳은 것으로 표상된다. 이와 같은 것은 남한사람들에게 희생적 삶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3․1 표상의 자산은 남한사람들을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대한민국에게도 유용한 것이었다.
    3․1 표상의 자산을 전용해 창립 초기의 대한민국은 남한사람들을 국가적 의제에 충성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바꾸는 국가적 사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3월 1일을 국가기념일화하면서 그 관련 행사를 국가화하고, 또 지방화․전국화는 물론이고 가정화와 개인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국가의 기쁜 날”(國慶日)에 걸맞게 다시 ‘국가축제’로 만들면서, 3월 1일을 기해 가로에서, 경기장에서, 또 극장과 학교 강당에서 축제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은 자신의 ‘삼일절’(三一節)을 ‘공적 공간’을 넘어 ‘사적 공간’인 가정 내로 들여보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3․1절 가정화’ 노력은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제(製) 3․1’을 남한 사람들 개별 신체와 머리에로 집어넣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정화(國定化)된 3․1절을 다양한 방식으로 남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면서, 대한민국과 그 엘리트들은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상(像)을 남한사람들의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하고, 또 그들 개별 신체에 새기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3․1절 의제의 실천 주체인 남한사람들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은 자신의 3․1절을 통해 남한사람들을 희생적인 대한민국 국민으로 단일화(單一化)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목표에 따라 3․1을 소환하고, 또 ‘3․1정신’으로 ‘단결정신’을 표상․강조하여 남한사람들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단일주의’를 고취하였다. 또 3․1절 경축식을 통해, 대한민국은 행사 참가자들인 남한사람들의 개인별 상이성을 배제하고 대신 국가에 의해 파악되고 단일하게 조직된 존재로, 또 그들에게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여 그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변모시키고자 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3․1절을 통해 남한사람들에게 희생정신을 주입하여, 그들을 ‘자기희생적 국민’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희생적 국민 생산 노력은 남한사람을 당대 대한민국의 국가적 의제의 실천 주제로, 그것도 국가 의제 실천에 자기 자신까지라도 희생할 수 있는 주체로, 남한사람을 변모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3․1이 창립 직후의 대한민국에 의해 국민이라는 정치적 주체의 생산에 동원․전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설립 초기 대한민국에 의해 전용․전유된 3․1의 모습이자, 3․1절의 국가․정치적 의미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3․1절이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과거의 3․1을 개발․동원하면서, 그것은 3·1이라는 과거를 오히려 역사에서 배제하고 망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3․1이 3․1절로 국정화되면서, 그것과 경쟁․충돌하는 3․1의 기억과 담론은 억압되고, 나아가 남한사회의 집단기억과 역사책에서 소거되었다. 해방 후 3․1을 둘러싼 경쟁은 각기 자신의 정치적 의제에 따라 자신의 3․1을 구성하였다. 예컨대, ‘좌익’의 3․1 담론은 ‘임정법통론’을 원인 무효화하고 ‘임시정부’의 민족적 대표성을 부인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적 건국 기원을, 또 이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민족국가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멸(湮滅)되는 것이 좌익의 역사쓰기와 기억만은 아니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민족주의적 대의와 그 지도성, 또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적대성’을 부인하는 이야기 또한 지워질 운명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3․1 국가화와 과거 기억의 국정화는 경쟁 기억의 인멸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기억의 선택과 배제는 배제될 과거의 대안적 함의 또한 소거(消去)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배제의 과정은 과거 3․1을 탈(脫)역사화하여, 오늘날의 우리로 하여금 3․1의 진행과정에 작동한 다양한 동기와 계기, 또 3․1의 역사적 진행을, 나아가 역사 자체를 볼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현재적 관심에 따른 3․1 전용․전유가 1919년의 3․1 자체를 형해화(形骸化)하고 화석화하는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역설이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정치적 의제에 의해 소환되어 3․1절로 국정화(國定化)된 과거 1919년 3․1의 운명이었다.

    영어초록

    From the outset, the Republic of Korea(R.O.K. hereafter) faced many challenges because of its regionality or non-nation-statehood. In this situation, the R.O.K., taking advantage of March 1st, represented itself as a nation-state. This representation was vividly seen in the phrase of the Preamble to the 1st Korean Constitution, "we, the people of Korea, proud of a splendid history and traditions dating from time immemorial, upholding the cause of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founded Republic of Korea." It shows that March 1st provided the R.O.K. in crisis with the ideational material to represent the polity as a nation-state and ultimately stabilize the regional polity. This was the role of March 1st given by the R.O.K. in its incipient days(August 1948~May 1950).
    March 1st was officially, institutionally recognized as a national holiday on the national calendar. Moreover, March 1st was recorded in school textbook as the climax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olonial Korea and the momentum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is official representation of March 1st was instilled in the students through school education. Also, the representation was spread out to the general masses in the society through national March-1st commemoration and other inventions such as official song used for the ceremony. As the national commemoration was followed by street parade, the official representation went beyond the limited place of the playground to the street, the place where popular masses lived ordinary lives, and accordingly to the society. At the same time, as the official commemorations were held across the country, the representation was consumed by more people even in rural areas and turned into collective memory.
    The effort to produce collective memory suggested what the implication of March-1st commemoration and other institutions concerned wa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O.K.. The institutionalized commemoration was used for the national propaganda of official agendas and even governing policies to secure popular consent to the agendas and policies. Moreover, the R.O.K., using March 1st, urged South Korean people to participate in official projects while transforming the people into R.O.K. kukmin(國民) who could sacrifice themselves for state and nation. In conclusion, March 1st was officially appropriated to the benefits of the contemporary agendas of the R. O. K., which constituted the official implication of March 1st.
    As the colonial past was reconstructed by the post-colonial present R.O.K., the past of the March 1st itself disappeared. The post-colonial competition for the representation of March 1st produced its conflicting images and at the same time the memories concerned which had been oppressed by the colonialism. However, as March 1st was identified in the linear development of '3·1→Provisional Government→the R.O.K.', the official representation of March 1st suppressed conflicting representations and memories and eliminated them from the collective memory of South Korean people, relegating them to collective oblivion. Likewise, the alternative potentials included in the competing representations and memories were erased from contemporary discursive space. This progress shows that official history-writing produced collective memory and collective oblivion simultane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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