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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고종의 통치권 장악 과정에 대한 일고찰 (A study on process of actual proclamation of Kojong's direct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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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6.22 최종저작일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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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고종의 통치권 장악 과정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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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수록지 정보 : 대동문화연구 / 72호 / 341 ~ 387페이지
    · 저자명 : 김성혜

    초록

    1863년 12월,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신정왕후의 지명에 의해 조선의 제26대 군주에 올랐다. 즉위할 당시, 고종은 아직 유약하고 제왕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이 행해지게 되었다. 1866년 2월에 수렴청정이 끝나자, 이번에는 실부인 대원군에게 정권이 위임되고, 고종은 성학에 힘을 쏟는 한편 대원군의 정책 결정과 추진 과정에 관여, 협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들어서 더욱 강화된 대원군의 권력 집중과 독점은 고종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여러 가지 통치 활동이 군주 권력의 안정과 확립에 기여한다고 믿고, 권력을 위임해 협력하고 있었지만, 대원군은 고종에게 통치권을 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자 고종은 대원군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군권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어, 주변에 외척 중심의 측근을 배치하고 반대원군적인 여론의 형성과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이때, 청에 파견되었던 사신으로부터 청황제의 친정과 친정에 대한 백성의 큰 기대에 대한 소식은, 고종에게 자신의 친정에 대한 포부를 키우고, 1873년 10월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은 실질적인 친정을 선포했다.
    고종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그의 최익현 처벌에 대한 정부 관료의 반대가 컸기 때문에 고종과 정부 관료, 또는 친대원군 세력 간의 권력 쟁탈로 전개되었다. 정부 관료가 고종의 최익현 처벌에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국청을 설치해 최익현의 불순한 의도를 상세하게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퇴진을 저지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대원군을 퇴진시켜서 통치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고종과 현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정부 관료의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정쟁이었고, 양쪽은 서로의 입장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고종은 계속해서 최익현의 국문을 통한 조사를 요구하는 영중추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을 파면시키고, 의정부를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로 새롭게 구성했다. 이것으로 1873년 10월에서 11월에 걸쳐 일어난 고종과 정부 관료 간의 갈등 국면이 진정되고,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해, 고종의 친정 체제 구축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영어초록

    In December 1863, 12-year-old Kojong(高宗) rose as the 26th monarch under the nomination of Shinjeongwanghu(神貞王后). Because Kojong was still young, fragile, and has yet to receive training and education on becoming an emperor at the time of his enthronement, regency by the queen mother commenced, also based on precedent. With the end of regency by the queen mother in February 1866, political power was transferred over to Daewongun(大院君), Kojong’s real father, and Kojong continued to concentrate on autocratic education while partaking in and collaborating with Daewongun in his policy-making decisions and progress.
    During the 1870s, however, Kojong began to see Daewongun’s increased convergence of power and monopoly as a threat. Kojong believed that Daewongun’s numerous political activities served the stability and security of sovereign authority and even entrusted Daewongun with authority of the monarch. Daewongun, however, refused to return sovereignty to Kojong and instead focused on expanding his own power base. Kojong then became apprehensive about Daewongun’s actions and sought to restore his own sovereign power. Kojong surrounded himself with relatives, mostly from his maternal side, and worked on creating anti-Daewongun sentiments and atmosphere. At this point, Kojong received a private message from China, stating the Chinese Emperor’s return to power and the Chinese people’s great anticipation for the emperor’s return.
    This message served as an inspiration for Kojong, who in October 1873 took advantage of Choi Ik-hyeon(崔益鉉)’s appeal and announced his actual rule. The formation of Kojong’s ruling system led to power struggles between Kojong and government officials who opposed Choi’s punishment and between Kojong and pro-Daewongun forces. On the surface, government officials claimed they opposed Kojong’s punishment of Choi Ik-hyeon because a state tribunal needed to be installed to conduct a detailed investigation into Choi’s rebellious intentions but, in actuality, the officials wanted to deter Daewongun’s withdrawal and maintain their hold on the government. This was a war between Kojong, who wished to relieve Daewongun and restore the sovereignty, and government officials, who were claiming the validity of the incumbent government in an attempt to protect their positions. In this struggle over national leadership, neither side gave way to the other. In the end, Kojong dismissed those officials who kept on insisting a trial for Choi Ik-hyeon and a newly structured Uijeongbu(議政府). With this, the conflict between Kojong and government officials that transpired throughout October and November 1873 was subdued and Daewongun retired from politics to complete the first phase in the buildup of Kojong’s rule.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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