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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外國 使臣들의 金剛山 遊覽과 그에 따른 弊害 고찰 (A Study on Mt. Kumgang Travel of Foreign Envoys' and Evils in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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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19 최종저작일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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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外國 使臣들의 金剛山 遊覽과 그에 따른 弊害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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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사학회
    · 수록지 정보 : 사학연구 / 101호 / 127 ~ 169페이지
    · 저자명 : 이상균

    초록

    금강산은 수려한 景勝과 함께 『華嚴經』 에 나오는 佛世界로 이름이 대ㆍ내외 적으로 널리 알려져 인간의 淨土라고 불릴 정도였다. 고려시대부터 遊覽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람의 대표적 名所였다. 조선에 오는 明나라와 日本의 使臣들도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했다.
    『朝鮮王朝實錄』 에 조선전기 금강산을 다녀간 사신들은 명나라 사신17명과 일본의 대마도 사신 1명이 나타나 있다. 명나라 사신 17명 중 15명이 宦官 출신이었고 이 중 9명이 조선에서 뽑혀갔던 火者들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많은 사신들이 금강산 유람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에서는 內地 정보유출을 우려해 대부분 요청을 불허하였다. 반면, 명나라 사신들이 유람을 요청하는 경우 對外關係를 고려하여 쉽게 거절하지못하였다.
    사신들은 조선에 오는 기회를 이용해 불교성지인 금강산을 보고자 했다. 대체로 사신들은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禮佛을 하고자 금강산유람을 요청하였다. 이들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기간은 10일 내외였다. 당시 都城에서 금강산을 가는 路程은 6일정도가 소요되었고, 금강산에서 예불을 위해 머무는 기간은 2~3일 이었다.
    금강산 유람 요청은 이들의 私的 요구사항 중 하나였고, 조선인 화자출신들의 요청이 가장 많았다. 사신들의 금강산 유람을 수행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수반되는 등의 폐해가 따랐다.
    조선에서는 사신들이 유람을 떠나기 전에는 미리 事目을 내려 모든일을 조치하게 하였다. 사신이 지나가는 각 官衙의 문서와 사찰의 事跡을모두 감추고 건물의 현판들까지 철거하도록 하였다. 조선에서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정책이나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내용을 사신들이 볼 시에 대외적으로 국가 이미지가 실추됨을 우려해서였다. 그리고 사신들이눈에 띄는 좋은 물건들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였다.
    사신들의 금강산 유람은 사전준비부터 매우 번거로운 것이었다.
    사신들이 출발할 때는 위로물품을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 관리들을接伴使로 삼고, 군인들을 보내 扈從하게 하였다. 금강산에 가 있는 동안에도 왕이 관리들을 보내 旅程을 위로하고 문안하게 하는 것이 慣例였다.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면 출발할 때와 같이 위로물품을 주고, 中路에 왕이직접가거나 관리를 마중 보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사신들과 사냥을하면서 농사에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사신들의 금강산 유람 중 가장 큰 폐해는 경비의 부담에 있었다. 사신들이 금강산을 갈 때 많은 수행원이 동원되었고 國賓의 격식에 맞추려면큰 비용이 수반되었다. 사신들의 금강산 유람에 소요되는 비용은 조정에서 별도로 마련해 놓지 않고 지방에서 충당하도록 하였다. 금강산이 있는강원도는 땅이 척박하고 인구수가 적어 비축되어 있는 곡식이 없었다. 사신 접대에 軍資를 사용할 정도로 재정상태가 좋지 못했고, 흉년에는 군자마저 동이 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람비용 충당은 강원도의 지방재정을더욱 악화 시켰다.
    그리고 사신 일행의 접대준비에 지역민들이 동원되었다. 중앙관리나有力者 등의 금강산 유람 접대에 지역민이 징발ㆍ동원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慣行이었다. 지역민들은 사시사철 찾아오는 금강산 유람객들의 접대에 수시로 징발되어 농사의 시기를 일실하는 등 삶이 더욱피폐해 졌다. 이에 자신들의 고을에 금강산이 있는 것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사신일행의 현지 접대는 모두 지방고을 스스로 준비하게 하게하였다. 접대준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관행처럼 지역민들을동원하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에서 사신들에게 금강산을 유람시켜 준 것은 외교적 實益을얻기 보다는 이들의 사적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었고, 국가재정과 행정력의 낭비를 가져온 것이었다. 재정은 더욱 악화되고, 수시로 접대에동원된 지역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던 것이다.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방 유람으로 인해 발생되는 폐해는 사신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전ㆍ현직관리들의 빈번한 유람이 지역에 더 많은 폐해를 끼쳤다. 이 같은 사항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람기록인 ‘遊記類’를 통해 살필 수 있어 향후 조선인들의 유람으로 인한 폐해도 밝혀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영어초록

    Mt. Kumgang was called as human's clean land(淨土) with graceful scenic places and buddhist world(佛世界) in 『Hwaeomgyeong(華嚴經)』 . Travelers have never stopped visiting the mountain since Koryo Dynasty. Even after Joseon dynasty came, this mountain has been a representative tourist attraction.
    Therefore, enjoys who came from Ming dynasty and Japan wanted to visit Mt.
    Kumgang.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17 envoys from Ming and one envoy from Japan visited this Mt. Kumgang as you can recognize in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Among 17 envoys from Ming, 15 people came from eunuch(宦官) and among 15 people, total 9 envoys were chosen to visit Joseon and they were Hwajas(火者). In case of Japanese, a lot of envoys asked visiting Mt. Kumgang but the government of Joseon dynasty hardly made permissions for them to visit due to the leak of national information.
    Envoys tried to visit Mt. Kumgang as they came to Joseon. Typically, those envoys asked visiting this mountain for a Buddhist service(禮佛) which was individual's religious faith. The period they traveled the mountain was more of less of 10 days. At that moment, 6 days were spent for going tomountain from the capital(都城) and the actual staying period in the mountain was 2 or 3 days. Traveling the Mt. Kumgang was one of their personal askings and Joseon Hwajas' favors were the largest. Envoys' traveling Mt. Kumgang led lots of side effects such as huge expensive costs.
    Before envoys leave for traveling, people were asked to deal with everything as applying the rules of law(事目). All the documents from government office that existed in the middle of the street that envoys were passing and trail works(事跡) were supposed to be hidden and buildings'signboards had to be pulled down. These kinds of orders from the government were because the officers were worried about loss of national prestige in case the foreign envoys watch harming Joseon's traditional customs or claiming official policies. Moreover, that was also because to provide envoys' impractical asking about wonderfully great materials. Envoys' traveling the Mt. Kumgang was very complicated and cumbersome from the preparation.
    Joseon officials threw a party and gave some compensative gifts for foreign envoys when they were about to leave. The officials were made as Jeopbansa (接伴使) and soldiers had to gollow to protect(扈從). It was a precedent(慣例)for foreign envoys that the King sent the officials and made them to entertain envoys and care itinerary(旅程). After the envoys finished traveling from the mountain, the officials gave compensatory gifts just like the envoys left and the King or the officials had to go middle of the road(中路) personally and gave a party for them. While the party was being held, farmers could be damaged because of hunting.
    Traveling for envoys' the biggest damage was an expensive cost. When the envoys visited the mountain, many entourages had to follow them and formal party's expense for state guests(國賓) was unbelievably expensive. The government did not assign the charges for envoys so people in countryside had to meet the demand for each time. There were not so many people in Gangwon-do where the Mt. Kumgang is placed and stored grains were not that much. At that time, the government had to welcome envoys with war chest(軍資) and had run out of provisions during the bad year. With this moment and reason, all the expenses for travel made the Gangwon-do's financial affairs bad.
    The local residents had to assist the event, either. This practice(慣行) that the local residents had to assist the event for main officials or envoys has been continued since Goryo dynasty. The local residents assisted those events frequently, as a result, their actual ordinary lives got damaged as they lost the opportunity for farming. For this reason, residents lamented their local mountain. Even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preparation to entertain envoys was absolutely the each countryside's work. This has been since Goryo dynasty like that.
    As a result of this, the traveling of Mt. Kumgang for envoys was all about foreign envoys' personal favors, not about benefits for own Joseon. Moreover,it caused a waste and damage of national administration. The financial affair became worse and because of the frequent entertain, the local residents became poorer.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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