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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동부도위 지역 邊縣과 군현지배 (Commandery-based rule over the peripheral prefectures of Nakrang Commandery)

4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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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10 최종저작일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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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동부도위 지역 邊縣과 군현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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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고대사학회
    · 수록지 정보 : 한국고대사연구 / 78호 / 139 ~ 183페이지
    · 저자명 : 김병준

    초록

    본고에서는 최근 중국 호남성에서 발견된 里耶秦簡의 내용을 중심으로, 변군 내의 중심지역이 아닌 邊縣에서는 군현지배가 실현되기 어려웠다는 기존의 이해를 교정해 보고자 했다.
    먼저 호구부를 통해 드러난 낙랑군 변현은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호구수가 매우 적은 곳이었으며, 또 호당 구수의 비율도 내군이나 낙랑군 군치지역에 비해 높다. 이러한 현상은 里耶秦簡에 나타난 秦代 洞庭郡 遷陵縣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처럼 작은 변현이지만, 천릉현에는 縣廷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정밀한 행정 조직이 잘 갖추어졌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내군의 현과 비슷한 규모의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 隣郡으로부터 初吏를 차출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 변현에 설치되었다고 알려진 諸曹, 그리고 遼東郡으로부터 충원된 初吏와 동일한 모습이었다. 이와 같이 낙랑군 변현과 동일한 조건과 규모를 가진 천릉현의 사례를 통해, 변군의 변현이라고 하더라도 縣廷 업무를 위해서 내군 혹은 중심지와 동일한 군현지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존에 변현 특히 영동 7현과 관련해서 군현지배의 후퇴를 강조했던 또 다른 까닭은 한제국이 蠻夷의 침탈에 대응한 형식 및 그 군현지배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먼저 토착민의 저항이 한사군의 개편을 불러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에 대한 군현지배를 약화한 것이 아니라 大郡과 합병하는 방식으로 변군의 과도한 부세 문제를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 이른바 대낙랑군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둘째, 이렇게 대낙랑군이 형성되면서 설치된 부도위는 군사방어의 영역이 넓어져 다시 추가 설치된 군사기관일 뿐이지 治民기관이 아니었다. 동부도위가 이곳의 군사업무와 행정업무를 모두 직접 담당했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곳에 대한 군현지배는 약화되었던 것으로 이해했던 것은 잘못된 이해였다. 셋째, 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에는 이곳의 지배가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동부도위의 폐지는 이곳 토착민의 침탈때문이 아니라 전국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도위 폐지 이후 王調의 반란 진압과정 중 영동 7현의 渠帥들이 후한에 항복해 왔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들을 영동 7현에 縣侯로 봉해주었다. 이 縣侯의 侯國은 이민족 거수에게 명목적으로 주었던 爵號가 아니라 열후에게 사여된 식읍으로서 여전히 郡으로부터 파견된 관리들이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縣級 지방행정기관이었다. 즉 이들 縣侯는 군현지배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니라 군현지배체제 안의 존재였다. 적어도 고구려가 華麗城을 공격하는 118년까지는 군현제 하의 후국으로서 남아있었던 것이다.

    영어초록

    In spite of the household registration wooden slips excavated in Pyongyang, many previous studies have been still reluctant to accept the universal control of the Han empire over the Nakrang commandery. It may result from the assumption that peripehral prefectures must be different from the center of the commandery in terms of dominance. Some factors like small numbers of households in peripheral prefectures appeared in the household registration woonden slips might have supported this assumption. However, newly excavated wooden slips of Liye give a new light on this problem, which show important informations about how to control the peripheral prefectures of Tongting commandery during the late Qin period.
    The conditions of peripheral prefectures between Nakrang and Tongting were very similar. The scale of the households was very little and the ratio of the persons per household was very high. These aspects might come from the fact that these areas were composed of indigenous peoples. Despite of these small and indigenous features, the whole wooden documents of Liye show us that Qin government pushed the well-organized and tightened control over this peripheral area with a great amount of expenses. Therefore the peripheral prefectures of Nakrang commandery would be as same as the Tongting commandery. At least it could be said there were great efforts to carry through the dominance even to the peripheral prefectures. This paper also reviews some misunderstandings over the transmitted written materials. Many previous studies emphasizied the resistance of the native people against the empire too much. However, the way how the empire responed to this resistance should be equally studied. Firstly, Han empire did not withdraw on the ground that there was resistance. They strived to find some ways to continue the dominance over the peripheral areas, one of which in Korean peninsular was to make some commanderies into a big one, so called “Big Nakrang.” Secondly, unlike previous understanding, the “Eastern Section Defender” did not rule the “Seven prefectures” in terms of civil administration, it was installed to make active steps to conrol these areas militarily. Thirdly, the abolition of “Eastern Section Defender” did not mean the abandonment of the “Seven prefectures.” Previous studies misunderstood the Marquis as the independent indigenous power out of Nakrang commanery, but it was bestowed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o the native chiefs after their betrayal to Wang-Jo and surrender to the Later Han. The “Prefecture Marquis” was the administrative organization under the Nakrang commandery. These marquises remained until the Goguryeo attacked the Hwaryeo Castle, which was one of the “Seven prefectures.”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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