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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坪大君房全圖」와 御製祭文을 통해 본 朝鮮王室의 友愛 宣揚 (Accentuating royal brotherhood through the “Mansion of Prince Inpyeong” and Jeongjo’s funeral o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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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07 최종저작일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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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坪大君房全圖」와 御製祭文을 통해 본 朝鮮王室의 友愛 宣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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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고전번역원
    · 수록지 정보 : 민족문화 / 45권 / 313 ~ 354페이지
    · 저자명 : 김종태

    초록

    선시대에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第宅은 麟坪大君(1622~1658)의 집이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3째 아들이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동생이다. 인평대군과 봉림대군은 駱山과 宗廟를 각각 등 뒤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두 누각 朝陽樓, 夕陽樓를 짓고 살았다. 조양루는 봉림대군이 15살이던 1633년에, 석양루는 인평대군이 20세이던 1641년에 건립되었는데 3살 터울이 나는 두 형제는 鈴索으로 불리는 방울을 단 동아줄을 연결하여 서신을 왕래하고 안부를 묻는 등 우애가 각별하였다. 효종이 왕으로 있는 동안 인평대군은 여러 가지 보호를 받아 제택의 규모를 늘리고 화려한 생활을 누렸다. 현종 대에도 이런 기조는 이어졌다.
    그러나 숙종 대의 경신환국(1680)으로 인평대군의 아들 삼형제가 역모로 몰려 죽고 영조대에는 다시 그 증손자가 당쟁에 휘말려 죽자 화려하던 제택은 퇴락하고 급기야는 동물이나 거지들이 들락거리며 이웃 사람들이 꽃나무를 땔감으로 베어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여종 得玉의 저주라는 귀신 이야기가 장안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몰락을 거듭하던 인평대군 집안은 1731년 귀머거리 李埱을 봉사손으로 삼아 겨우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정도였는데 1751년(영조27) 영조가 本宮에 들렀다가 이숙을 만나보는 것을 기점으로 다시 중흥하게 된다. 이숙의 아들 李鎭翼은 1751년 昌慶宮 崇文堂에서 영조를 알현하여 선대의 御札과 우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1773년에는 慶熙宮 集慶堂에서 인평대군의 遺稿를 가지고 입시하여 영조의 명으로 校書館에서 간행하였다.
    한편 인평대군의 사후 효종을 비롯하여 숙종․영조는 치제문을 친히 짓고 썼는데 중심 내용은 인평대군의 우애이다. 특히 이 제문에는 숙종과 영조 자신이 인평대군의 후손을 죽인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1792년(정조16)에 정조는 이진익에게 인평대군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고 치제문비를 세우게 하였으며, 閣臣 徐榮輔에게 인평대군 사당을 봉심하고 인평대군 제택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 명하였다. 이는 비정한 정치 현실로 무너진 왕실의 우애를 선양하고 나아가 왕실과 왕권을 강화하려는 큰 구도 속에서 나온 조치이다.
    그동안 규장각에 소장된 「麟坪大君房全圖」는 제작 연대가 불명하였으나 이번 연구로 1792년에 제작된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인평대군 묘소 앞에 세워진 2기의 비문 내용을 인평대군 후손의 당쟁 연루와 비교 분석하여 조선 왕실에서 그 우애를 선양한 맥락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인평대군방전도」와 인평대군 致祭文碑의 이해를 심화시켜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고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울러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이진익의 손자 寀重은 球로 이름을 바꾸어 영조의 동생 延齡君의 嗣子인 恩信君의 후사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南延君이고 그의 아들 흥선은 대원군이 되고 손자 고종은 황제가 된 역사적 사실은, 그 진진한 왕실 가계의 곡절로 인하여 인평대군의 우애가 반영된 그림과 비문에 문화적 흥미를 더해 준다.

    영어초록

    The mansion of the Prince Inpyeong, the third son of Injo and younger brother of Hyojong, was the most splendid residence in Seoul at that time. On the opposite side of Inpyeong’s mansion, there was the mansion of the Prince Bonglim, the future Hyojong. In the back of Inpyeong’s mansion there was Mt. Nak, while in the back of Bonglim’s house, there was Jongmyeo, the National Shrine. The main building of Inpyeong’s residence was the Joyang Pavilion built in 1633, while the main structure of Bonglim’s was the Sekyang Pavilion built in 1641. During the reign of Hyojong, the Prince Inpyeong enjoyed his brilliant house.
    After the death of Inpyeong and the tragic end of his sons during the political strife of 1680, the mansion became a deserted house and people came there to cut down the trees for the firewood. Only Yi Suk, a deaf man who was left as one relative of the Inpyeong family, kept the memorial service for ancestors.
    However, Yi Jinik, the son of Yi Suk, changed the fortunes of the mansion. In 1752, he met Yeongjo and let the king know about the brotherhood of Inpyeong and Hyojong. In 1773, he showed the posthumous works of Prince Inpyeong to Yeongjo and made Inpyeong’s anthology under Yeongjo’s orders. Yeongjo composed the funeral oration for Inpyeong and praised the brotherhood. The next king, Jeongjo, was touched by the story of Inpyeong and Hyojong, and asked Se Yeongbo to paint the mansion of Prince Inpyeong. Presumably with political motivations, Jeongjo aimed to show the virtuous brotherhood of the royal family to the world. It can be assumed that the anonymous painting “Mansion of Prince Inpyeong” currently preserved in the Kyujanggak must have been produced in 1792 under the orders of King Jeongjo.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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