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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The life of Park Jae-hyeok, Euiyeoldan Member and the Bombing of Pusan police station by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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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06 최종저작일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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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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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 수록지 정보 : 항도부산 / 37호 / 191 ~ 248페이지
    · 저자명 : 박철규

    초록

    박재혁(朴載赫)은 1895년 5월 17일 범일동 183번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했다. 1911년 3월 22일 부산진사립육영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제4회로 졸업했다.
    박재혁은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에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함께 『동국 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했다. 3학년 때에는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오재영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했다.
    박재혁은 1917년 6월 부산을 떠나 3년 이상 상해와 싱가포르 등지를 왕래하면서 인삼 등의 무역업에 종사했다. 동시에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신심을 다져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부산경찰서가 타격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당시 의열단이 3.1운동 이후 기존의 독립운동노선에 방향전환을 선언하고 조직됐는데, 제1차 국내기관총공격 계획이 1920년 6월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관련자 전원이 체포됐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거두어 이를 반전시켜야 할 필요성 요구됐기 때문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관문이며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개발됐으며, 제2의 오사카로 불렸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했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경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공무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 가까이 접근하자, 서장이 집무를 멈추고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투탄했다. 당시 하시모토 서장은 경상을 입었다. 박재혁도 부상을 입어 탈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법의 1심부터 1921년 3월 31일 진행된 경성고법의 3심까지 일관되게 ‘살인미수죄’가 적용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는 원심이 파기되고 박재혁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박재혁은 1921년 3월 31일 3심인 경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박재혁은 체포된 후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의 상처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폐병까지 얻게 되었지만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에 대구 감옥에서 사망했다.

    영어초록

    Jae-hyuk Park was born as the only son in 183 Beomil-dong on May 17, 1895. At the age of 15, his father passed away and he lived with his mother and sister. On March 22, 1911, he graduated from Busanjin Primary School, and on March 22, 1915, he was the fourth graduate of Busan Public Commercial School.
    While attending Busan Public Commercial School, Jae-hyuk Park secretly reproduced and distributed 『Dongguk History』 with Cheon-taek Choi, Byeong-tae Kim and Hong-gyu Park. In his third grade, he formed Gusedan(救世團) with Cheon-taek Choi, Byeong-tae Kim, Hong-gyu Park, and Jae-young Oh, and issued a noticed to promote national identity in Busan and the whole region of Gyeongsangnam-do Province.
    Jae-hyuk Park left Busan in June 1917 to Shanghai and Singapore for more than three years to work in the trade industry. At the same time, he was seeking ways to contribute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while interacting with his companions. He then decided to devote himself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Busan Police Station was targeted as the attack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hen Euiyeoldan had been organized by declaring the change of direction to the existing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was when everyone involved was arrested upon failure of the first national full-scale attack plan in June 1920. As a result, Euiyeoldan needed to achieve results and reverse the situation in a short time.
    Busan was also a gateway from Japan to Joseon and was developed as the typical colonial city, and had its symbolism as it was called as the second Osaka.
    In preparation for the rebellion, Jae-hyuk Park obtained information that Hashimoto, the Busan police chief, liked ancient books and disguised himself as the Chinese ancient book dealer by taking advantage of his experience in trade business.
    At about 2:30p.m. on September 14, 1920, he entered the Busan Police Station pretending to be on duty, approached chief Hashimoto from the right side and threw a bomb after declaring himself as a member of Euiyeoldan when the chief turned his body towards him.
    At that time, chief Hashimoto was slightly injured. Jae-hyuk Park was arrested at the scene after failing to escape due to his injury.
    Jae-hyuk Park was consistently charged with 'attempted murder' from the first trial of the Busan District Court to the third trial of the Gyeongseong High Court on March 31, 1921.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life imprisonment at the Busan District Court. However, the appeal by the prosecution annulled the original decision at the trial at the Daegu High Court, and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death. Eventually, Jae-hyuk Park was sentenced to death as his final judgment on March 31, 1921 after the third trial of the Gyeongseong High Court.
    Jae-hyuk Park suffered from lung diseases due to tortures after arrest and injuries from the bomb, but his spirit was never thwarted. He died in Daegu prison at 11:20a.m. on May 11, 1921 before the execution.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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