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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코릴타이” 성립배경 연구 (Research on the Background for the Conclusion of Talas Qurilt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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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26 최종저작일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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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코릴타이” 성립배경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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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백산학회
    · 수록지 정보 : 백산학보 / 97호 / 237 ~ 267페이지
    · 저자명 : 류병재

    초록

    1269년 봄 ‘탈라스 코릴타이(탈라스 회맹)’가 성립되기 전·후 카이도의‘쿠빌라이에 대한 반란’ 관련 기록은 『元史』등의 한문사료와 『집사』등의 페르시아 사료에서 모두 발견된다. 그러나 탈라스 회맹 자체에 대한 기록은 페르시아 사료에는 보이지만 『元史』를 비롯한 한문사료에서는 그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대칸 쿠빌라이의의 권위에대한 카이도의 반란과 도전의 시발점이며 이를 통해 대몽골올로스는 분열이 가속화·고착화되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한문사료에는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쿠빌라이와 카이도가 첨예한 대립의 각을세우고 몽골제국의 통합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양자 대립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 중요한 사건이 어째서 한문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것일까? 단순한 失記나 거리상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기에 元代발간된 한자사료 모두에서 일제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논문은 “탈라스 코릴타이”의 成立의 전후관계를 파악해 이 회맹이 실제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 그 성사배경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탈라스 회맹의 성립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탈라스 회맹의 본질은 무엇인지 파악하였다. 탈라스 회맹은 어거데이家의 카이도를 대칸으로 선출하고 차가다이家의 바락, 조치家의 멍케테무르(대리인 베르케 체르)가 연합하여 대칸 쿠빌라이의 반대세력을 형성하고 몽골제국을 분열로 몰아갔다는기존의 통설을 부인하였다. 즉 탈라스 회맹의 실상은 카이도는 반쿠빌라이그룹의 수장으로서의 ‘대칸’으로 추대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과 ‘안다(Anda,盟友)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대칸 올로스 변방에서 쫓겨 온 카이도가 자신의 군사적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주지역을 근거지로두고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획된 ‘바락 회유책’의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봐야한다.
    쿠빌라이는 아릭버케와의 대칸위권 전쟁에서 불리한 戰勢를 ‘제국분할통치안’이라는 결정을 통해 만회하였다. 그리고 탈라스 회맹에서 결정된 사마르칸트 분할은 더 이상 대칸 직접 통치를 받는 정주지역이 아니라 본 회맹의 일원으로 참여한 차가다이 올로스의 바락에게 그 지배권이 이양되었기 때문에 대칸 쿠빌라이는 이 회맹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체계적으로 잘 짜여진 몽골제국의 역참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정보와 물자를 전해주는 지를 확인하였다. 또한 칭기스칸 이래정복된 정주지역은 대칸의 직할령으로 귀속되어 대칸의 代官다로가치들에의해 철저히 관리되었다. 대칸의 직할령을 대칸의 허가 없이 임의로 처리하였다가 ‘몽골제국의 세계경영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경험한 당사자가 쿠빌라이임을 감안할 때, 실제 탈라스 회맹은 반역과 반란의 의도가 없었기에 회맹 자체가 성립될 수 있었고 대칸 쿠빌라이 자신도 이에 대한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초록

    Before·after the conclusion of ‘Talas Quriltai’ in the spring of 1269, the record on ‘rebellion against Qubilai’ is all found in Chinese historical material such as Yüan Shih(元史) etc. and Persian historical material like Jāmi’ at-tavārīkh(集史) etc. However, the record on the Talas Quriltai itself is seen in Persian historical material, it is not visible in Chinese historical material including Yüan Shih. Generally speaking, this event is the starting point of Qaidu’s rebellion and challenger against the authority of Qubilai, and thereby is considered as an important event through which the division of Yeke Mongol Ulus was accelerated · fixed,however its record does n’t remain. Though this is such an important event considered to have initiated the bilateral conflict where Qubilai and Qaidu were in sharp confrontation with each other and shook completely the integration of Mongol Empire, what is the reason this has not been recorded in Chinese historical material? This is too weird to dismiss it as the issue of missing or distance in that all the Chinese historical material found in the period of Yüan keep silent. This article is aimed at comprehending how this covenant was concluded by understanding the context of ‘Talas Quriltai’, what the background is and what the historical 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Talas Quriltai was understood to figure out the background of concluding Talas Quriltai. Talas Quriltai denied the conventional orthodoxy that Qaidu of Ögödei Ulus was elected as Qa’an, and Baraq of Chaghadai Ulus, Mönke-Temür of Jochi Ulus(an agent, Berke Cher) united and formed the rebellious power against Qubilai, driving Mongol Empire to division. That is to say, the truth of Talas Quriltai is that Qaidu was not crowned to Qa’an as a captain of the group against Qubilai, but was on terms of ‘Anda(盟友)’.
    It is safe to say that this is the ‘conciliatory policy of Baraq’ by Qaidu pursed from the frontier of Qa’an Ulus in order to minimize the military loss and secure his power with the settlement of Transoxiana serving as a base.
    Qubilai compensated for the unfavorable tide of war against Arigh Böke for the position of Qa’an through the decision of ‘governance of empire division’. And in addition, in the division of Samarkand decided in the Talas Quriltai the imperium was turned over to Baraq Chaghadai Ulsu who participated as a member of the covenant, not settlement under direct control,Qa’an Qubilai did not make a issue of this covenant itself. The efficiency of the postal station of Mongol Empire was identified to have a system in the delivery of goods and information. Furthermore, the settlements conquered since Chingis Khan were vested in the territory of Qa’an and then managed thoroughly by Darughaqi of Qa’an. Considering that Qubilai experienced the pain of being excluded from global management of Mongol Empire, from his arbitrary handling of Qa’an’s territory, the actual Talas Quriltai could be reached since there was no intention of rebellion, and therefore Qubilai did not make an immediate, active military response to this.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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