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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救荒論과 자유 상업의 확산 (Guhwangnon(救荒論) and the Proliferation of Free Commerce in the Great Han Empir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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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22 최종저작일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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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救荒論과 자유 상업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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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고려사학회
    · 수록지 정보 : 韓國史學報 / 78호 / 183 ~ 221페이지
    · 저자명 : 김기성

    초록

    갑오개혁기 조세금납화는 서울의 穀荒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동시에 상업의 발달을 통해 미곡 부족에 따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언론을 중심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그러나1897년 대규모 흉년이 발생하였을 때 시장을 통한 미곡의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구매력이 없는 빈민들은 시장을 활용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기 언론들은 공통적으로 군수, 이서, 상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벌이는 부정한 상업행위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면서 부정한 상업을 통한 사익추구는 배척하고 국부에 도움이 되는 올바른 자유 상업을 옹호하는 언설을 통해 미곡 무역 및 자유 상업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러한 언론 논조의 배경에는 자유 상업을 통해 국가와 백성을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국민국가적인 욕망에 대한 공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독립신문』에서는 자유무역에 가까운 형태로 외국과 무역을 확대해야 하고, 상품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하며, 외국의 자본을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성신문』은외국인 특히 일본인에 의한 이권과 상권의 침탈을 경계하면서도 자유로운 상업을 긍정하였으며, 미곡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진을 위해서는 일본인 자본가와도 합작할 것을주장하였다. 그러나 1901년의 흉년을 계기로 또 다른 흐름이 등장하였다. 『황성신문』을 중심으로 구황책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당시 안남미의 수입, 권분, 내장원 소유 미곡의 공급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회사 설립을 통한 구휼이었다. 회사를 세워서 미가가 저렴할 때 미곡을 매입한 뒤 미곡이 부족하여 미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시장을 통해 공급하고 이익금은 진휼자금에 보충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회사는 자본금을 모아서 상호부조에 가까운형태로 운영된다. 따라서 근대적 회사는 아니며 오히려 운영은 권분과 가까운 방식이다. 그리고 미곡은 거저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통해 저렴하게 공급하도록 하고 있다. 즉 시장을 통한 공급에 가까운 전통이 선택되어 근대와 결합하는 양상이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극단적인 자유무역을 통한 미곡의 공급방식도 약간이나마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대한제국기 구황론에는 재구성된 전통이 근대와 결합하는 한편 그 속에서 시장은 위기와 함께 영역을 확장되고 있었다.

    영어초록

    Josegeumnaphwa(租稅金納化) in the period of the Kabo Reformation was enforced in its entirety, despite the concerns about Gokhwang(穀荒) in Seoul. At the same time, the logic that it is possible not only to resolve a crisis caused by lack of rice but also to make the country rich and powerful by promoting the development of commerce was extended and re-produced by the media. When a crop failure occurred all around in 1897, the supply of rice in the markets became limited. Inparticular, the poor, without purchasing power, had difficulty using such markets. The media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continuously criticized the corrupt commercial activities of country headmen(郡守), Iseos(吏胥), and merchants to satisfy their self-interests, denounced the pursuit of self-interest, and quelled concerns about rice trade and free commerce by advocating for free commerce, which they said would contribute to national wealth. Behind such a tone of argument raised by the media was the shared desire with the nation-state to make the state and people rich and powerful through free commerce.
    In particular, “The Independent” suggested that trade with foreign countries be extended, products be allowed to move freely, and foreign capital be widely accepted through free trade.
    Hwangseong Sinmun(皇城新聞) affirmed free trade, and thought it warned Japanese plunder of concessions and commercial rights.
    Furthermore, he argued for the collaboration even with Japanese capitalists to enhance the national wealth through the export of rice.
    Another tendency, however, appeared due to poor harvest in 1901.
    The need for relief policy from famine was actively raised by Hwangseong Sinmun and others. Thus, some measures such as the import of Annam(安南) rice, Gwonbun(勸分), and the provision of rice possessed by Naejangwon(內藏院) were suggested. Among these measures, the relief through the foundation of companies was most interesting. Its purpose was to complement the relief fund with profits created by establishing companies and letting them buy rice when its price was lower and provide it at a more affordable price than the market price, when such prices increase due to scarcity.
    Here, the companies are operated through mutual aid, by collecting capital.
    Therefore, they were not modern companies, but instead operated in the form of Gwonbun. Rice was not freely distributed, but was provided at a low price in the markets. The tradition close to the provision through markets was adopted and simultaneously combined with the modern style. The provision of rice through extreme free trade became gradually persuasive. The tendency of Guhwangnon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shows that the tradition reorganized in crisis was combined with the modern style, while the domain of markets was also extended.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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