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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元宗·忠烈王대의 親朝 외교 (At the Qan's Court: The Decision Making Process between the Mongol Qan and Koryŏ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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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11 최종저작일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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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元宗·忠烈王대의 親朝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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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사연구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사연구 / 177호 / 151 ~ 190페이지
    · 저자명 : 정동훈

    초록

    이 논문에서는 고려 원종과 충렬왕대에 고려국왕이 몽골 조정에 親朝했던 사례를 분석하고, 그 당시 양국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고 해결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고려 원종은 재위 15년간 2차례, 충렬왕은 34년간 11차례 입조하였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국왕의 친조는 제1기에는 주로 황제의 지시에 응해서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의구심을 품은 채 되도록 입조를 회피하려고 하였다. 제2-3기에는 충렬왕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입조를 요청해서 실현되었고, 종종 황제가 입조를 중지시킨 사례도 확인되었다.
    2) 국왕이 입조하면 세조 쿠빌라이는 그를 직접 만나서 현안을 논의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원종과 쿠빌라이의 면대 사례는 확인되지 않지만, 대신 그를 수행했던 李藏用과 같이 책임있는 고려의 陪臣들이 황제를 만나 직접 고려의 이해를 강변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충렬왕은 세조와의 면대를 통해 산적해있던 양국간의 현안을 폭넓게 해결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성종은 충렬왕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 채 면대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3) 제2기에 충렬왕이 세조와 대면하던 장면은 당시의 일반적인 御前奏聞 형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上奏者로서 충렬왕과 陪奏者로서 원의 관리가 참여하였으며, 통역은 주로 고려인 출신 관원들이 담당했다. 회의는 주로 충렬왕의 上奏와 그에 대한 세조의 王言(넓은 의미의 聖旨), 즉 정책결정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은 한림원의 書記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 과정에서는 일반적인 몽골인 관리와의 御前奏聞과 그 정책결정이 몽문직역체의 璽書(좁은 의미의 聖旨)로 기록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반적인 문어체로 다시 한 번 번역되는 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성종대에는 충렬왕의 의사는 문서화된 表文을 통해 상주되었고, 주된 논의와 결정은 황제와 中書省 관원 사이의 소통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구두를 통해서만 국왕에게 전달되었을 뿐, 성문화된 璽書는 발급되지 않았다.
    4) 특히 일본 출병을 앞둔 시점이나 1298~1300년의 征東行省 증치기와 같이 고려 국내에 원의 군대나 官員 등이 파견되어 있었을 경우, 이들은 원 중앙관부와 직접 문서를 주고받음으로써 고려조정과는 별개로 정책을 집행하여 혼란한 상황이 연출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의 최고결정권자인 황제와 국왕이 대면하여 논의한 결과는 가장 권위있는 결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대개 황제는 고려국왕의 주청을 거의 그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제3기에는 충렬왕과 성종의 면대가 불가능했으므로, 고려국왕은 원의 중서성을 거쳐서만 황제와 소통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중서성의 독자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국왕의 의지가 관철되지 못하는 사례도 자주 등장하였다.

    영어초록

    This study examines the diplomatic decision making process in late 13th century, particularly when the King of Koryŏ had attended to the Mongol court. During his reign(1259-74), Wŏnjong visited Qubilai's court twice, while King Chung'nyŏl attended seven times to his father-in-law's court, and four more times to Temur's court.
    In the early 13th century, Koryŏ kings were forced to appear in the Mongol qan's court as a sign of surrender. Qubilai frequently asked Wŏnjong to come to his capital, and the king and his advisers always hesitated. On the contrary, King Chung'nyŏl actively requested to attend, and occasionally the emperor did not accept the requests.
    When the king appears, Qubilai preferred to meet him in person and discussed the issues. There is no confirmed case of Wŏnjong's encounter to the emperor in person, but the ministers who accompanied him met the emperor and persuaded Koryŏ's interests. Through face-to-face confrontation, King Chung'nyŏl was able to solve a wide range of difficulties between the two countries. On the other hand, Temur Qan ignored the desperate wishes of King Chung'nyŏl and did not provide the opportunity.
    The scene of face-to-face encounter between Qubillai and King Chung'nyŏl was consistent with the stereotyped format of the Imperial Conference. The King was a reporter, the Mongolian officials attended as observers, and the interpreters were mainly undertaken by the Koreans. The conference consisted mainly of the king's reporting and the emperor's orders, and the proceedings were recorded by secretaries. In Temur's court, however, the kins's arguments were delivered through documents, and the main decisions were drawn by the qan and his ministers, with the king excluded. The results were notified to the king only through verbal messages, and no written documents were issued.
    In the 1270s, when Yuan's military forces and bureaucrats were dispatched to Koryŏ, such as when they were about to leave for Japan, they used to exchange documents directly with their central government. They therefore enforced their own policies independently of the Koryŏ government, which often lead to confusion. In such a situation, the outcome of the face-to-face discussions between the qan and king, the supreme decision maker, could be regarded as the most authoritative decision. In most cases, the Emperor accepted the King's requests. However, since Temur rarely gave a chance to face him directly, the king could communicate with the emperor only through the Secretariat. And in this process, the independent judgment of the Secretariat occasionally intervened, often led to the failure of the king's will to survive.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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