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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大官寺 조영과 그 목적 (Silla's Construction of Daegwansa and Its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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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11 최종저작일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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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大官寺 조영과 그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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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 수록지 정보 : 대구사학 / 154권 / 1 ~ 40페이지
    · 저자명 : 신은이

    초록

    익산 왕궁리유적은 백제 말기에 왕궁으로 건립된 시기와 사찰로 변화한 시기로 구분된다. 사찰 관련 유적에서는 ‘대관관사’, ‘대관궁사’, ‘왕궁사’와 같은 사찰명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661)조에 기록된 대관사와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동안의 연구들에서는 대관사를 백제 무왕 시기, 무왕과 의자왕의 교체 시기, 의자왕 시기에 조영된 사찰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의 “대관사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너비가 다섯 보가 되었다”라는 기록은 당시 일어난 사실을 반영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대관사와 관련이 있는 사찰 명문 기와들의 제작 시기는 신라 삼국통합 이후로 편년 된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3년(683)에 창건된 영축사와 관련하여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핏빛과 같았다” 그리고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영축사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영축사 절터의 발굴조사에서는 ‘대관’명 기와가 출토되었다. 대관사가 위치한 익산지역과 영축사가 위치한 울산지역은 정치 군사적 거점지역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영축사와 대관사 사이의 유사한 사실들은 두 사찰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목적 아래 조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금마저 지역은 백제 왕궁이 위치하였으며 보덕국의 중심지로, 신라에 편입된 정복지이면서 정치 군사적 거점지역이었다. 보덕성민의 반란은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 승려들이 참여한 반란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신라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백제와 보덕국의 상징적 공간인 금마저의 왕궁을 사찰로 용도를 변경해 신라가 대관사를 조영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대관사와 금마저에 관한 기록이 태종무열왕의 죽음에 앞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신라 일통삼한의 표상인 태종무열왕의 죽음과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였음을 의미하는 일통삼한(삼국통합)을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으로 금마저와 대관사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대관사를 조영하여, 청주 운천동사적비와 문무왕의 유조 내용과 같이 ‘신라가 일통삼한하여 더 이상 추위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일통삼한 의식을 널리 알려 백제 유민,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수습해 나갔을 것이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신라가 삼국통합 이후 시행한 삼국의 영역과 주민을 하나의 통일체로 만들기 위해 시행한 정책을 9서당 편제, 9주 5소경제도, 제사 체제 정비,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에 대한 관등 수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신라가 삼국통합 이후 백제 왕궁이 위치하였고 보덕국의 중심지였던 금마저 지역에 대관사를 조영하여 백제 유민,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수습하여 사회를 안정화해 나갔음을 밝혀보았다. 이와 같은 신라의 대관사 조영은 일통삼한 의식이 반영된 삼국통합 정책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영어초록

    The Wanggung-ri relic of Iksan was utilized as a royal palace and changed in its use as a Buddhist temple at some point. The relic related to the temple had roof tiles inscribed with temple names such as "Daegwangwansa," "Daewanggungsa" and "Wanggungsa" excavated. They indicate that Daegwansa recorded in an article from the eighth year(661) of King Taejong Muyeol in the Silla Bongi of Samguksagi stood here.
    Previous studies estimated that Daegwansa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Mu in Baekje, the transition period between King Mu and King Uija, or the reign of King Uija. Their grounds are in the records of the King Taejong Muyeol dynasty in the Silla Bongi of Samguksagi. The records read "Water turned into blood in the well of Daegwansa. The blood flew over the land of Geummagun in the width of five bo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e records reflect the reality of the times. It is chronologically recorded that the roof tiles excavated at the Wanggung-ri relic and inscribed with the temple names related to Daegwansa were made after Silla's integration of the Three Kingdoms. It is considered that Daegwansa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Sinmun in Silla.
    A royal palace of Baekje was located in the Geummajeo area, which was the center of Bodeokguk and a political and military base conquered and incorporated into Silla. It is estimated that the drifting people and Buddhist monks of Goguryeo and Baekje participated in the revolt of people inside the Bodeok fortress. Silla must have paid more attention to the rule of this area after the revolt. One of their measures was to change the use of the royal palace, which was a symbolic space of Baekje and Bodeokguk in Geummajeo, into a Buddhist temple. Silla thus built Daegwansa.
    The records about Daegwansa and Geummajeo in Samguksagi were written before the death of King Taejong Muyeol. It indicates that Samguksagi considered Geummajeo and Daegwansa as a historical place to represent the death of King Taejong Muyeol who symbolized the consciousness of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and Silla's integration of Baekje and Goguryeo through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integration of Three Kingdoms). It is likely that Silla broadly promoted the consciousness of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which says "People of Three Hans can no longer worry about cold and hunger thanks to Silla's unification of Three Hans," stated in the Wooncheon-dong Memorial Stone of Cheongju and the Yujo of King Munmu by building Daegwansa, thus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among the drifting people of Baekje and Goguryeo. These findings suggest that Silla's construction of Daegwansa was one of its policies to integrate the Three Kingdoms by reflecting the consciousness of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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