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NER
검증된 파트너 제휴사 자료

17세기초 명·청교체와 대중국 사행의 변화 - 대후금 사행을 중심으로 - (The Ming - Qing Transition and the Change of Sahaeng(使行) toward China in the early 17th century)

43 페이지
기타파일
최초등록일 2025.04.10 최종저작일 2015.03
43P 미리보기
17세기초 명·청교체와 대중국 사행의 변화 - 대후금 사행을 중심으로 -
  • 미리보기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 수록지 정보 : 한국문학과 예술 / 15호 / 31 ~ 73페이지
    · 저자명 : 김경록

    초록

    명·청교체는 한국사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특히 한·중관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은 명 중심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국 관계를 중시했다. 17세기 명청교체의 정세변화는 조선의 대중국 외교관계를 변화시켰으며, 조선은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청 중심 국제질서로 전환됐다. 17세기 전반기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와 조·중관계를 정리 ·분석하기 위해 세부적인 시대구분으로 선조말엽(10년), 광해군대(14년), 인조대(27년) 등이 유용하다. 선조말엽 조선은 임진왜란의 결과를 시대적으로 정리하는 과제가 중시되었는데, 전후복구의 국내상황과 명·후금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서둘러 일본과 화친을 맺게 됐다.
    광해군대 조선은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과의 화친을 마무리하고, 명과 후금의 대립에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시행했지만, 명 중심 국제질서에 편입된 상황에서 군대파견을 피할 수 없었다. 광해군의 명과 후금사이의 양단외교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폐모살제와 더불어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본 논문은 정묘호란의 발발과 그 이후 조선과 후금 사이의 외교관계에 대해 주목한다. 정묘호란으로 평양약조가 체결되자 조선의 대후금 정책은 강경한 입장에서 타협적인 입장으로 변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인조의 외교노선이 광해군의 실리적인 노선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식상으로 형제지맹을 맺었지만, 실질적으로 후금의 외교적 강압에 시달렸다. 조선은 명 중심 국제질서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사행관계를 맺어 대명·대후금사행을 병행했지만, 병자호란으로 청 중심 국제질서로 편입됐다.
    정묘호란의 결과로 조선은 후금에 예물을 진헌하고, 사신을 파견했으며, 각종 경제적 압력을 받았다. 전통적인 대명사행과 달리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시기 까지는 변형된 형태의 사행관계가 맺어졌다. 첫째, 조선의 대중국사행의 변화양상이며, 둘째, 시기별로 조선은 요동, 중국대륙의 정세에 따라 사행을 파견했고, 셋째,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까지 10여년 동안 대명사행과 대후금사행이 병행되었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 대후금사행이 주류를, 대명사행은 지속이라는 점만 존재하는 제한된 사행이었다. 넷째, 대명사행에 비해 대청사행의 우세경향이며, 다섯째, 병자호란이후 年貢사행의 파견이 시작됐고, 여섯째, 조・후금사행에서 교린관계에서 적용되는 춘신사와 추신사가 파견됐다.
    대후금 사행은 춘신사, 추신사의 명칭으로 불렸으며, 1년에 2차례 파견됐다. 외교문서로 국서를 사용했고, 대후금관계에 익숙한 인물을 계속해서 사신으로 파견했다. 대후금 사행은 공세적인 후금의 외교적·군사적·경제적 압박에 대해 조선의 입장을 최대한 전달하고 조율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의주개시를 비롯한 교류문제, 쇄환인문제, 세폐문제, 사행에 대한 예우문제 등이 대후금 사행의 외교사안이었다. 대후금 사행은 병자호란이후 조선이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책봉국과 조공국의 관계가 성립되어 정식 조공제도에 입각한 사행이 시행되면서 종료됐다. 조선의 대후금 사행경험과 절차는 향후 대청사행의 제도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어초록

    The Ming-Qing Transition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topics in historic studies in Korea. It also takes a special role in the research field of history of Korean-china relationship. Joseon has concerned to diplomatic relations toward Ming about situations that Joseon was pouring her efforts into obtaining security in an international order of Ming center. The Ming-Qing transition in the early 17th century changed Joseon's diplomatic relations toward China and Joseon was incorporated from an international order of Ming center to an international order of Qing center.
    In the early 17th century, It is useful in analysis of relations between Joseon and China that distinguishing in the time of the late SeonJo(宣祖) period, the Reign of Gwanghaegun(光海君), the Reign of InJo(仁祖). Joseon conclude a treaty of friendship with Japan in the late SeonJo(宣祖) period because in need of post-war reconstruction work and to prepare for a gloomy situation of the Ming-Houjin war.
    The Joseon had a friendly relations with Japan through the Kiyou agreement(己酉約條) and Korea pursue policy of neutrality about the Ming-Houjin war in the Reign of Gwanghaegun, but was unable to evade military dispatch that because belonged in an international order of Ming center.
    This paper inspects outbreak of the Houjin invasion in 1627(丁卯胡亂) and the bargaining between the two countries after the war. From the beginning of war to making pledge in Pyongyang, Joseon's attitude was changed from adamancy to compromise. This change thoroughly demonstrated that Injo's diplomatic guideline had been regressed to Gwanghaegun's realism.
    Joseon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Brothers of Union(兄弟之盟)' as a matter of form with the Houjin after war, but suffered from the Houjin diplomatic pressure substantially. Joseon wanted belonging in an international order of Ming center, so run parallel with Sahaeng(使行) toward the Ming-Houjin, but was incorporated in the international order in the centre of the Qing into war.
    Joseon dispatched Sahaeng's name toward Houjin was 'Chunshinsa(春信使)', 'Chushinsa(秋信使)', and was sent twice a year. Chunshinsa is person familiar with the United States was selected, and present ‘a sovereign's message(國書)’ as diplomatic documents. Joseon's Sahaeng toward Houjin are solved various diplomatic issues such as withdraw troops of Houjin from Joseon, requesting captives from Houjin coming into being by the war, rejecting Houjin's request for commerce on Joseon's frontier. Joseon showed strong but flexible character in diplomacy. During diplomatic struggle, Joseon's different attitudes toward the Ming and the Houjin caused tremendous psychological gap to Houjin. This had deepened Houjin's hostility to Ming Dynasty and Joseon and led the Joseon-Houjin's relationship to new conflicts. The Qing invasion in 1636(丙子胡亂) between Joseon and Qing as a watershed to narrate the change of Joseon's diplomatic status towards Qing. After the war, Joseon dispatched the Sahaeng on the Qing alone.

    참고자료

    · 없음
  • 자주묻는질문의 답변을 확인해 주세요

    해피캠퍼스 FAQ 더보기

    꼭 알아주세요

    •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한국문학과 예술”의 다른 논문도 확인해 보세요!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방대한 자료 중에서 선별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목차부터 본문내용까지 자동 생성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캐시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5년 08월 02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00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