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대 한국사 뿌리깊은 이야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재평가 대상 인물의 선정 동기
1.2. 문서의 구성 및 목적
2. 최명길의 생애와 업적
2.1. 최명길의 가계 및 성장 과정
2.2. 최명길의 주요 업적
2.3.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의 활동
3. 최명길에 대한 평가와 재해석
3.1. 부정적 평가와 그 배경
3.2. 긍정적 평가와 그 근거
3.3.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명길
4. 흥선대원군의 집권 배경과 개혁정책
4.1. 세도정치와 조선의 상황
4.2. 통치 체제 정비
4.3. 경복궁 중건
4.4. 수취 체제 정비
4.5. 서원 정리
5.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과 외침
5.1. 제너럴 셔먼호 사건
5.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5.3. 척화비 건립
6.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
6.1. 긍정적 평가
6.2. 부정적 평가
7.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재평가 대상 인물의 선정 동기
최명길은 당시 조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응 방식에 대한 평가 작업으로 제기된 주장 중 하나인 주화론을 주장하고 척화론의 대표자인 김상헌과 대립하는 주화파 인물로서 한국사 속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로 선정하였다.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을 주된 갈등으로 하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아 최명길을 재평가할 대상 인물로 선정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의 대부분의 인물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가졌던 최명길은 "역적"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최명길의 주화론이 보다 현실적이고 옳았다고 판단되므로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여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1.2. 문서의 구성 및 목적
문서의 구성 및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 문서는 역사적 인물인 최명길을 재평가하고자 작성되었다. 문서의 구성은 크게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서론에서는 최명길 인물 선정 동기와 문서 구성 및 목적을 설명한다. 2장 본론에서는 최명길의 생애와 업적, 병자호란 당시 활동을 소개한다. 3장에서는 최명길에 대한 부정적·긍정적 평가와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명길의 모습을 살펴본다. 4장과 5장에서는 동시대 인물인 흥선대원군의 집권 배경과 개혁정책, 대외정책과 양요 등을 서술한다. 마지막 6장 결론에서는 최명길과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종합하여 제시한다.
이를 통해 최명길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고 당시 시대상황과 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게 이 문서의 목적이다.
2. 최명길의 생애와 업적
2.1. 최명길의 가계 및 성장 과정
최명길은 1586년(선조 19년) 금천에서 태어났다. 최명길의 아버지인 최기남은 1559년(명종 14년)에 태어난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학문에 매우 뛰어났다. 최기남은 광해군대에 영흥부사로 있다가 계축옥사에 연루되고, 이후 간신히 목숨을 건져 가평으로 내려가 약 7년 동안 은둔하다 1619년(광해군 11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최기남은 한때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박탈되는 등 학문의 길을 걷는 데에 어려움이 존재하였었으나 이후 1600년 왕자사부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이끌 정도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최명길은 8세 때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라고 맹세하여 부모를 놀라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최명길의 스승으로는 이항복과 신흠이 있었고, 조익, 장유, 이시백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가평에 내려가 조익, 장유, 이시백 등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고, 특히 양명 왕수인이 이룩한 신유가철학인 양명학을 독학하며 학문 연구에 힘써왔다. 양명학은 당시 조선에서 배척되던 학문이었다. 역사가들은 최명길은 만약 병자호란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칭송받았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2. 최명길의 주요 업적
최명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최명길은 인조를 조선의 16대 왕으로 추대한 당시 최고의 문관 중 한 사람이다. 최명길은 인조를 국왕으로 추대하게 된 데에 아버지인 최기남과도 연관이 있다. 최기남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문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해군대에 영흥부사로 재직하다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왕자사부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이끌 정도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최명길은 8세 때부터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라고 맹세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로 알려졌다. 최명길의 스승으로는 이항복과 신흠이 있었고, 조익, 장유, 이시백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가평에 내려가 이들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고, 특히 양명 왕수인이 이룩한 신유가철학인 양명학을 독학하며 연구에 힘써왔다.
최명길은 홍문관의 부제학으로 재직할 때 관제 개혁을 주장하였고, 병조참판 시절에는 백성들의 부세와 군량미를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이 재논의되자 재납세의 선행 조건으로 호패법 시행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호패청 당상이 되어 호패법을 주관하였다.
1623년 4월 11일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에는 주화파의 선두 주자였다. 정묘호란 이후 이귀, 강홍립과 함께 후금과의 강화에 성공시킨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척화파들과의 대립이 격렬해져 많은 비난을 받았다.
2.3.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의 활동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김상헌, 홍익한 등이 주장한 척화론에 대해 명분보다 현실적인 정세에 초점을 두어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론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최명길은 정묘호란 이후 이귀, 강홍립과 함께 인조에게 강화가 불가피하다며 후금과의 강화에 성공시킨다. 이로 인해 조선과 후금이 형제 나라가 되며 조선이 후금의 동생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일단락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강화를 주도하며 특히 상황에 따라 스스로 신하라 자처할 수 있다고 발언하면서 척화파들과의 대립이 격렬해지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청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황제를 자처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내부에서 국왕인 인조부터 관료, 백성들까지 오랑캐와 한번 붙어 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청진에 왕래하며 강화의 조건을 타진하며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은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비난을 받았으나 인조 14년, 병자년에 최명길의 말대로 청나라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공격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청나라의 연이은 공격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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