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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의 미술은 15세기 중엽 세종 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문예가 꽃피웠던 초기의 문화적 성숙기에 비견할 만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중요한 시기였다. 조선 초기의 민족문화와 미술의 발달이 성숙기였다면, 후기는 부흥기라고 볼 수 있다.
후기에는 기존의 부당한 사회적 여건이나 정치제도의 개혁을 모색하고, 신분제도의 개선을 주장하며, 다양한 학문적 연구에 실증적인 태도를 취하는 실학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순조기에 이르며 극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와 사회 분야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회화의 영역에서도 후기에는 새로운 큰 조류가 나타났다. 첫째, 중기 이래 유행하던 절파의 화풍이 쇠퇴하고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둘째, 남종화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진경산수화가 대두하였다. 셋째, 풍속화가 풍미하게 되었다. 넷째, 서양화법이 유입되었다. 다섯째, 신선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후기 화단에는 삼재(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로 불리는 뛰어난 화가들을 포함하여,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배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문인화가로는 강세황, 이인상, 윤제홍, 신위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며, 특히 남종화풍이 학구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 시기가 정선(1676~1759)의 화가로서의 출현을 전후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1.2. 후기 회화의 새경향과 정선의 출현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절파 화풍이 쇠퇴하고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남종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화풍인 진경산수화가 대두하였다. 진경산수화는 실제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뜻하지만, 거기에는 실경과 차원을 달리하는 신선이 사는 깨끗한 곳을 그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이전까지 있었던 실경산수화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진경산수화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 화법을 섭렵하고 직접 여행을 통해 우리나라 산천을 관찰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하였다. 그는 관념화된 중국의 산수화를 과감히 버리고 우리나라의 실경을 소재로 삼았으며, 조선의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산천에 알맞은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30대~50대 전반은 정선 화풍의 형성기로, 실경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던 시기이다. 50대 후반~60대 후반은 정선 화풍의 완성기로,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화풍을 보여주었다. 70대~80대는 정선 화풍이 형식화되는 시기였지만, 세련미의 절정을 이루어 완숙기로 접어들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기존의 화가들과 달리 중국의 관념적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실경을 직접 관찰하고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로 인해 그는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화단을 풍미하게 되었다.
2. 정선의 생애와 작품연구
2.1. 정선의 생애
정선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이며,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金昌集) 형제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올라 양천 현감(楊川縣監) 등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긴밀한 교유를 하였는데, 이들과의 사귐은 그의 회화 세계를 넓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진경산수를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필묵법으로 화면에 담아내었다. 강한 직선의 수직준법, 대담한 산형의 변형, 굵은 미점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연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는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2.2.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선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며 경험한 우리나라의 산천을 화제로 삼아 독자적인 진경산수화 양식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회화의 큰 흐름은 중기 이래 유행했던 절파의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남종화에 기반을 둔 진경산수화가 대두하였고, 풍속화와 서양화법의 유입, 신선도의 유행 등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 등 삼재라 불리는 뛰어난 화가들과 더불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같은 대가들이 등장했다.
정선(1676~1759)은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지만,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형제의 도움을 받아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관료로 활동하면서도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 문인들과 교유하며 회화 세계를 넓혀갔다. 정선은 직접 여행을 하며 우리나라의 실제 산천을 화제로 삼아 진경산수화를 그려냈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관념화된 중국 산수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경향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아직 실경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5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 사이에 정선화풍이 완성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산 화첩』, 『문바위』, 『사인암』 등이 있다. 마지막 시기인 70-80대에는 형식화되면서도 세련미가 절정에 달했는데, 대표작으로 『천하절승 구룡폭포』, 『인왕산도』, 『금강산 전도』 등이 손꼽힌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리나라 실경의 특색을 살려냈다. 그의 작품에서는 습윤한 피마준법, 편필 직필의 'J'자형 소나무묘법, 부감법의 원형구도 등 정선만의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수 경관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정선은 생모와 부모를 모시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왕실과 문인 사대부 계층과 교유하며 회화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이러한 그의 다면적인 면모는 진경산수화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그의 화풍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강희언, 김윤겸, 정황 등 다양한 화가들이 정선파를 형성하며 그 전통을 이어갔다. 더불어 문인화가들인 심사정, 강세황, 정수영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정선은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작품 감상
3.1. 문바위
'문바위'는 가원도 통천의 바다가에 있는 절경으로, 정선은 이를 뛰어나게 표현해냈다. 정선은 세련된 필치로 힘있게 내리그어 깎아 세운 듯한 바위의 생김새를 그려냈다. 그리고 바위의 아래에 여러 인문들을 그려 바위의 높이를 강조하면서도, 그 둘레에 넓게 펼쳐져 있는 호연한 바다를 담아내어 안정감을 주었다. 이를 통해 정선은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고 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