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발전과 농민항쟁
1.1. 서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상업이 발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정치·사회의식이 성장하여 항조운동 등을 전개하고, 중인들은 신분해방운동도 펼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 모습과 농민항쟁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1.2. 농민항쟁
1.2.1. 중세사회의 모순 반영
중세사회의 모순이 조선후기 농민항쟁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사회 내부에 존재했던 다양한 모순이 누적되면서 이것이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발전과정에서 더욱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중세사회 내에서는 관리들의 중간착취와 횡포로 인한 삼정문란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였다. 관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행태가 만연했던 것이다. 이는 농민들의 원성을 사며 갈등을 야기하였다.
둘째, 중세사회의 신분제도 역시 모순적이었다. 엄격한 신분제로 인해 평민과 천민들은 상위 신분인 양반들에 의해 차별받고 억압받았다. 이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셋째, 중세사회 내에서는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와 토지에 기반한 생산활동이 지배적이었다. 토지는 대부분 지주들의 소유였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살아가며 착취를 당했다. 이러한 불평등한 토지소유 관계가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넷째, 중세사회는 중앙집권적 왕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취약했다. 수도와 지방, 그리고 각 지역 간의 격차가 컸고 지방 지배세력들의 자율성이 높았다. 이는 농민들의 지역적 차별과 착취를 낳았다.
이와 같이 중세사회 내부에 내재되어 있던 다양한 모순과 갈등이 조선후기로 이어졌고,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에서 더욱 첨예화되면서 농민항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1.2.2. 사회경제적 발전과 농민층 분해
조선 후기 농민층의 분해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결과였다. 소농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이 분해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주제 모순이 심화되었다. 특히 고율지대와 빈번한 재해로 인한 궁박 판매 등으로 인해 부농층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농민의 계급구성이 지주, 부농, 중농, 소빈농, 임금노동자층 등으로 변모되어 갔다. 이는 지주제의 전면적 재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신분제 변화 측면에서도 양반호구의 격증, 상민호구의 격감, 노비호의 실질적 소멸 및 솔거노비의 절대수 감소 등을 통해 전통적인 신분구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평민과 천민들의 신분상승운동도 추진되었는데, 이는 납속책을 주로 이용하였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확고했던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적 향촌질서가 붕괴되고 향촌사회는 관의 일방적 통제에 놓이게 되었다. 향회는 18세기 이후 지방 수령의 부세 자문기구로 변질되었는데, 이전에는 부세운영과 향임 등에 대한 인사권 장악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현물납 체제 하에서 국가의 지방에 대한 지배가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와 그 안에서의 지배계급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1.2.3. 부세정책의 변화와 갈등
기존의 조용조체제가 해체되는 가운데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가는 경향을 띠었다. 부세정책은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위에서 총액제(공동납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동법과 균역법, 19세기에 들어와 진행되었던 부세의 도결화 현상 등이 전자, 전세에서의 비총제와 군역세에서의 군총제(이정제), 그리고 환곡에서의 이환제 등은 후자의 내용을 이루었다. 전자의 특징은 그 자체가 중세적 부세 체제를 부정하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중세사회의 해체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이는 변동하고 있던 사회경제적 조건 하에서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조치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정부는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부세수취를 총액제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부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농민항쟁과 요호부민, 양반사족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개별적인 향조투쟁이나 피역을 위한 유리, 도망 등과 같은 형태로 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그 목표도 자신들이 처한 계급적 처지와 관련하여 보다 명확해졌다.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대토지 소유자였던 부민층이나 양반토호들이 중심적 역할을 하다가 빠져나가고, 그 중심이 소빈농층으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1862년의 농민항쟁은 군현단위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주도층에 의해 농민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있었고,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 요호부민, 양반토호였다.
그들은 부세문제 중에서도 특히 도결의 혁파와 환곡의 폐단제거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중앙 관료의 전횡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발전은 농민들의 정치, 사회의식을 고취시켜 각종 항조운동과 항쟁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중앙정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요호부민과 양반토호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의 터전마다 중앙관료의 전횡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중앙의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특권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벌열정치가 나타나고, 향촌사회 내부에서 사족중심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어 중앙정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1.4. 결론
중앙의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특권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벌열정치가 나타나고, 향촌사회 내부에서 사족중심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특히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발전은 농민들의 정치, 사회의식을 고취시켜 각종 항조운동과 항쟁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고 결과적으로는 중앙정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여기에 요호부민, 양반토호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의 터전마다 중앙관료의 전횡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2. 농민항쟁 연구사
2.1. 서론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E. H 카에 의해 주창된 이 구절은, 역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며 학습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에 실제 있었던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논하거나, 현대의 역사가들이 주관적인 시선으로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는 등 과거와 현재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연구하거나 학습하는 데 있어 현대의 사학자나 사학도들의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특히 특정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에서는 19세기 조선 왕조 후기에 발생한 다양한 농민항쟁과 관련하여, 근대 이후의 사학자들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연구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2. 농민항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
2.2.1. 식민사학
식민사학은 일본 제국의 정당화 수단으로서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반영된 역사관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조선이 "정치적 혼란"과 "부패"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을 근대화시키고 질서를 회복했다고 역설하였다.
구체적으로 식민사학자들은 조선후기 농민항쟁을 "부패한 조선 정부에 의해 자행된 농민 수탈"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이들은 농민항쟁이 단순히 정부의 수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일차원적인 등식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화 논리로 활용하였다.
더불어 식민사학에서는 조선 왕조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불가피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즉, 식민사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 역사를 해석하고 왜곡한 것이다.
결국 식민사학은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2.2.2. 내재적발전론
내재적발전론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조선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역사 해석이다. 조선후기 사회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모습들, 즉 농업생산력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확산, 사회계층의 분화 등이 근대로 나아가는 자생적 발전의 징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조선후기에는 봉건적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이 분해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른 농민항쟁도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농민층은 토지 소유와 경영을 확대하는 부농층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상업자본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중간계층인 중인들도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