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근대적 식생활과 소비문화의 변화
1.1. 일제강점기 식품 관련법 정비와 사회변화
1.1.1. 식품위생법 정비와 육류 소비 관행
일제 강점기에 들어 한반도에 도입되었던 '식품위생법'은 근대적 식품위생 관련 제도 중에서도 특히 육류의 유통 및 판매와 관련된 도수규칙에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식품위생관련 제도라는 점과 기존 산업화나 상업화로 인해 파생된 타 식품위생제도와 달리 이미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육류 관련 상행위 및 식생활관습에 영향을 주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이래 소는 농우로 사용되었으므로 도살에 대한 제한을 받아왔다. 제용과 제찬, 그리고 궁중에 사용될 소만 도살이 허용되었고, 한성의 경우 성균관 소속 전복들이 운영하는 현방이 독점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사용할 물량 공급을 위한 포사의 설치는 각 지방 관아에서 허가여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소고기와 우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사설 포사가 생겨났고, 포사영업은 포사주인 및 지방 관아와 관속의 주요 수입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고로 수납되어야 할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자, 제도 개혁이 단행된 것이 포사규칙이었다.
포사규칙은 위생설비 요건에 대한 명문 규정을 갖추지 않고 관습상의 기준만 있었다. 또한 세금 부과기준도 불합리한 면이 존재했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적 성격의 도수규칙은 도살 대상 가축의 종류를 소 외에 양, 돼지, 말, 개까지 확대하였고, 도장의 허가에 위생 요건을 까다롭게 규정하였다. 도살되는 개체 두수에 수수료를 부과하는 등 보다 강력한 국가적 통제를 하고자 하였다.
1911년 '수육판매규칙'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육류 판매유통에 관여하는 상인들의 상관행에 변화를 유발하게 되었다. 청결한 영업환경 조성, 도살 도구의 위생관리 등이 새로운 규제사항이 되었다. 이는 기존 방식으로 판매업을 하던 조선인들에게 상관행을 폐기하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익히도록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도수규칙과 수육판매규칙은 일제의 육류산업 장악전략의 일환이었다. 도축장을 관영화하고 도부업·수육판매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을 관리함으로써, 중간착취를 차단하고 식량공급을 안정화하려 하였다. 결국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력 강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1.1.2. 주류 법 정비와 주조업의 변화
주류 법 정비와 주조업의 변화는 조선시대에는 각 농가가 자가용으로 생산하거나 소규모 술집에서의 생산·판매가 대부분이어서 전적으로 주조업에 종사하는 이가 지역사회에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식민지기의 주세령 체제하에서 자가용 주조가 금지되면서 주조업자의 합동집약이 진전되었다.
조선주는 크게 약주·탁주·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선주의 독특한 풍미를 가져오는 것은 누룩이다. 누룩은 일반적으로 밀을 반죽하여 틀에 넣고 건조시켜 완성되는데, 이 누룩과 쌀을 원료로 하여 밑술을 만들고 여기에 다시 덧술을 넣어 완성된 아직 거르지 않은 술 위의 맑은 술이 '약주'이다. 또한 누룩과 쌀 등을 원료로 담가서 만든 뒤 걸러서 만든 것이 '탁주'(소위 '막걸리')이며, 소주는 약주의 술지게미 또는 누룩과 쌀 혹은 고량 등을 원료로 고리라는 증류기를 사용하여 증류한 것이다.
누룩은 농가의 부업으로 제조되어 시장에서 판매되었으나, 1916년 주세령이 발포되면서 주조업의 통폐합이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주세령에서는 한 주조장의 제한 석수(연간 최저 제조 석수)를 설정하여 영세 경영을 도태시키고, 조선주에 대해서는 자가용 주조도 인정했지만 일반의 주세보다 세율을 높게 설정하여 이익을 얻을 수 없도록 했으며, 조합제도를 서서히 도입하여 통합을 진행시키고 신규면허를 억제하는 등 다양한 시책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 주세령 시행 당시 전국에 9만 이상 있던 탁주 주조장이 1930년경에는 4천 곳 정도로 격감했고, 자가용 주조의 면허를 받은 사람도 1916년 29만 명에서 급속히 줄어 1930년에는 거의 소멸하였다. 1934년 주세령 개정에 따라 마침내 자가용 주조 제도 자체가 없어졌고, 이후 자가용 주조는 '밀조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총독부의 주세 수입은 계속 상승하여 1928년에는 국세 총액의 28.8%에 달하게 되었다.
1.2. 새로운 식재료의 도입과 식생활의 변화
1.2.1. 설탕의 도입과 식생활의 변화
19세기 이전까지 설탕 소비문화는 생산지나 교역이 빈번한 곳에서 발달했다. 그 이외 지역에서는 설탕이 희소한 제품으로 최상류층만이 사용하는 귀한 약재, 장식재였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세계적으로 설탕의 쓰임새가 바뀌었다. 근대적 설탕 소비는 전근대와 달리 세계적으로 설탕이 음식과 관계를 맺는 과정이었다. 설탕 가공식품이 세계화되고, 설탕이 각국 음식과 융합하여 토착화되었다. 설탕 소비가 확대되면서 세계인의 음식 기호, 취향, 입맛이 변하고 식사구조가 변화했다.
을사조약이후 국권상실 위기 속에서 일본의 탈아입구론 영향을 받은 한국 문명 개화론자들은 일본을 통해 설탕 문명화 담론과 영양담론을 수용했다. 이들은 서구인들이 많이 먹는 설탕이 칼로리가 높아 에너지를 공급하는 영양식이라고 믿었다. 설탕이 인체에 매우 유효하여 많이 먹은 나라일수록 체력이 좋아져 문명화, 근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설탕은 국민건강을 위해 국가적으로 소비를 장려해야 하는 근대적 영양식품이었다. 서구중심적 설탕 문명화·영양담론은 해방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한말 왕실을 비롯한 최상류층이 먹던 설탕가공식품은 1930년대 말이 되면 도시 소학교에 다니는 한인 어린이가 이틀에 한 번 이상 먹는 식품이 될 정도로 소비층이 확대되었다. 설탕은 더 이상 약재로 사용되지 않고 음식과 결부되면서 용도가 확대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직후 일본정부가 전시물자 확보를 위해 수입을 통제하면서 설탕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일제는 '문명'론과 '영양론'에 입각한 설탕 담론을 개조했다. 1940년 3월 학무국장이 어린이의 인내심과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당분 섭취를 억제하라는 통첩을 내렸다. 이와 같이 중일전쟁 이후 설탕 공급량이 감소한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설탕 및 과자 수요를 억제하면서 소비가 위축되었다.
1.2.2. 아지노모토의 도입과 식생활의 변화
아지노모토는 1909년 일본에서 발명된 조미료로, 이후 1910년대 조선으로 도입되어 식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지노모토는 완성된 음식에 첨가되는 새로운 식재료였기 때문에, 새로운 식습관의 도입에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