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러일전쟁 을사조약"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동양 역사의 이해
1.1. 1870년대 사건
1.1.1. 강화도 조약
1.2. 1880~1890년대 사건
1.2.1. 임오군란
1.2.2. 갑신정변, 텐진 조약(일본과 청), 청프전쟁, 동학농민전쟁, 전주화약
1.2.3. 거문도사건
1.2.4.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1.2.5. 을미사변
1.2.6. 갑오개혁
1.2.7. 대한제국 국호변경 및 개혁단행
1.3. 1900년대 사건
1.3.1.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서명
1.3.2. 포츠머스 조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사조약
2. 러일전쟁의 원인과 영향
2.1. 러일전쟁의 배경과 원인
2.1.1. 러일전쟁 이전의 동북아 정세
2.1.2. 러일전쟁의 원인
2.2. 러일전쟁의 전개과정
2.3. 러일전쟁의 영향
2.3.1. 한반도에 미친 영향
2.3.2. 동북아에 미친 영향
2.3.3. 세계정세에 미친 영향
2.4. 러일협약의 배경과 내용분석
2.4.1. 제1차 러일협약
2.4.2. 제2차 러일협약
3.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정세인식과 대응
3.1. 고종황제 및 근왕세력
3.1.1. 러시아
3.1.2. 미국
3.2. 관료집단 및 재야유생
3.2.1. 전통적 인식: 조약파기론
3.2.2. 근대적 인식: 조약무효론
3.2.3. 재야유생층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동양 역사의 이해
1.1. 1870년대 사건
1.1.1.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은 1876년 2월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로, 1870년대 청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발생한 사건이다. 이 조약의 체결 원인은 1875년 9월 발생한 운요호사건과 조선이 펼쳤던 통상수교거부 정책 때문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이 명시되었다. 또한 양국은 15개월 뒤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하기로 하였고, 부산 외에 두 곳을 개항하여 일본인의 왕래와 통상을 허가하였다. 더불어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에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일 때는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해안 측량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국권 약화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1.2. 1880~1890년대 사건
1.2.1. 임오군란
임오군란은 1882년 6월 9일부터 7월 13일까지 발생한 사건이다. 임오군란의 원인은 1876년에 맺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민씨 정권은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설치해 우대하였다. 이에 반해 구식군대는 신식군대와의 차별 및 보상 부족으로 불만이 쌓여 폭발하게 되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나라가 관여하여 군란을 진압하였고, 청의 군대는 군란 진압 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조선에 주둔하며 군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조선의 내정, 외교에 간섭하며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하여 통상특권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청의 경제적 침투가 심화되었다.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결과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통해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2. 갑신정변, 텐진 조약(일본과 청), 청프전쟁, 동학농민전쟁, 전주화약
임오군란 이후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 및 손해배상에 대한 내용을 담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일 간섭이 심해져 내적으로 개화 세력과 보수 세력의 갈등이 깊어져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축하연」에서 일어났다. 민씨정권의 요인들은 처단되었으며 급진 개화파는 신정부 요인 발표와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빠른개입으로 3일만에 끝나게 되었고, 주도자였던 김옥균,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갑신정변 이후 청-일본은 상대국가에게 알리도록 하는 내용의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거나 철수할 때 상대국가에게 알리도록 하자" 라는 톈진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양반 지배층의 억압 및 부패로 가득한 지방관으로 인해 고통받던 농민들이 각지에서 항쟁을 일으켜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1893년 포교의 합법화를 정부에 요구하는 운동이 전재하자 동학의 신 지도부인 정봉준, 손화중 등은 "이용화영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고 의병을 일으킨다)" 기치를 내 걸고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정부는 농민들의 투쟁을 진압하지 못해 청나라 군대의 출병을 요구하고, 출병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자국의 해외공관 및 거주민 보호 명목으로 파병하였다.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은 청·일 양군의 개입에 위기감을 느껴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1.2.3. 거문도사건
거문도사건은 1885년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진행된 사건으로,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이 조선 남해 섬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 이후 해밀턴 항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국령임을 선포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영국의 점령에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2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거문도사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조선 정부는 청의 내정간섭과 일본의 여러 가지 행패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찾고 있었고, 이에 러시아와의 친분을 두텁게 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주의의 외교정책은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은 조선에서의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었다.
거문도사건의 결과,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해밀턴 항구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정부의 항의에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2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거문도사건은 강대국 간의 각축이 조선 영토 내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청과 일본의 간섭, 러시아의 남하정책, 영국의 러시아 견제 등 복잡한 국제정세가 조선의 영토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1.2.4.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동학농민군이 조정과 화해를 한 후 흩어지자 조선은 청, 일본에게 자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시하였지만, 일본은 조선의 침략을 목적으로 군대를 배치하였기에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새벽에 경복궁으로 난입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두었으며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관리들을 임명하면서 조선의 여러 제도를 개혁하게 하였다.
이렇듯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가 명확해지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출병을 요구하였고, 출병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자국의 해외공관 및 거주민 보호 명목으로 파병하였다.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은 청·일 양군의 개입에 위기감을 느껴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이후 1894년 7월 25일 대부도 부근의 일본함대가 청나라의 함대에 포탄을 쏘며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한 상황이었기에 1895년 4월 17일 일본에 조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국가예산의 2배가 넘는 돈을 배상하며 대만, 랴오둥반도 평후섬 까지 일본에게 넘겨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며 청일전쟁이 종료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청나라에게 요동반도 및 대만의 소유권,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여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납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친러내각을 만들려 하였지만, 결국 일본군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청일전쟁을 통해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일본의 지배력이 확대되었으며, 이후 발발한 러일전쟁의 단초가 되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1.2.5.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암살한 사건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 결과로 청나라에게 요동반도 및 대만의 소유권,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여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납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친일세력을 몰아내려고 노력하였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친러내각이 만들어지고 일본은 눈에 가시였던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운 후 시해하였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이후 미우라의 압력으로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고, 친러·민씨 세력은 해임되었으며 개화·친일 세력이 등용되었다. 또한 명성황후 살해 이후 조선 민중의 ...
참고 자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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