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1. 선사시대 구석기와 신석기 예술의 발전
선사시대 구석기와 신석기 예술의 발전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자연주의적인 예술 양식이 나타났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들은 동물과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술 작품을 단순히 대상의 재현이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 작품은 그들의 소망을 표현하고 달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마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림 속에 짐승이 걸려들게 되어 있는 함정을 만들어내는 '마술'을 행했다. 즉, 그들은 현실과 예술 작품을 동일시하며 모방과 현실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예술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착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신앙의식이 발생하면서 종교 예술과 세속적 예술이 분화되었다. 또한 생산물에 대한 보존의 욕구가 생겨나면서 전통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예술의 담당자 역시 분화되었는데, 마술사와 성직자들이 종교 예술을 담당하게 되었고 여성들은 주로 세속적인 장식용 수공예품을 만들게 되었다.
이처럼 선사시대의 예술은 인간의 생활, 사회, 경제 등 다양한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적 예술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반면, 신석기 시대의 예술은 신앙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종교 예술과 세속 예술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예술의 변화는 인간 사회의 발전과 함께 일어난 현상이었다.
1.2. 자연주의와 기하학 양식
자연주의와 기하학 양식은 선사시대 예술의 대표적인 두 가지 양식이다. 자연주의 미술은 실용적이고 순전히 경제적인 목표와 직결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림을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순수하며 어떠한 이지적인 작용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형태로 시각적인 인상을 재현하고 있었다.
반면 기하학 양식은 선사시대 후기에 나타나는데, 이는 정착생활의 시작으로 신앙의식의 발생과 관련이 깊다. 정착생활에 따른 생산물에 대한 보존의 욕구가 만든 비 개성적 전통주의가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문화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사시대 예술은 자연주의에서 기하학 양식으로 변화해 갔으며, 이는 인간의 생활양식과 신앙의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 예술의 기능과 활용
예술의 기능과 활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다. 초기 선사시대의 예술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을 지녔으며, 대상의 재현이자 소망의 달성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예술은 신앙의식의 발생과 함께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예술과 세속예술이 분리되었고, 예술가 역시 마술사와 성직자, 그리고 가내 수공예 제작자 등으로 분화되었다.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인해 예술이 가내작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전문화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예술은 사제와 왕의 수요에 따른 것으로, 현실과 격리되어 양식화되었다. 이는 예술가의 지위가 매우 낮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중제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형식에 치우친 인습이 생겨났고, 자유의지에 의한 표현은 억눌리게 되었다. 반면 아메노피스 4세 시대에는 자연주의를 내세운 예술개혁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귀족적이고 의례적인 성향이 강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예술은 이집트 예술보다 더욱 엄격한 규율에 매여 있었지만, 아씨리아 예술에서는 이원적 대립양식이 나타났다. 이는 구석기시대부터 관찰되던 수법상의 구분, 즉 동물은 자연주의적으로, 인간은 양식화되어 그려지는 경향이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끄리띠 문화의 예술은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회화적인 구도를 보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왕과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예술이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귀족의 세계관과 민중의 세계관이 공존하였는데, 비극과 같은 귀족문화 작품과 더불어 민중문화인 미무스 등이 병존했다. 특히 그리스의 민주제정치 시기에는 귀족적 특성을 가진 예술작품이 민중을 위해 공연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는 다양한 절충주의적 예술양식이 발전하였다.
이처럼 예술의 기능과 활용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해왔다. 사제와 왕의 권력과 통제 하에서 출발한 예술은 민중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세속화, 개인화되어 갔다. 그리고 각 시대와 지역의 고유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특성이 예술의 성격을 규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1.4.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구석기 시대에 예리한 관찰력을 지니고 구체적 현실 세계를 지향하는 화가들은 실제로 마술을 위해 그렸던 동물들에 대해 속속 들이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 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로 인식되고 마술사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이 분리되면서 아마도 예술활동의 담당자 역시 분화되었을 것이다. 무덤을 장식하는 예술과 우상조각은 주로 남자들, 특히 마술사와 사제들의 소관이 되었다.
이와 달리 세속적인 예술은 순전히 장식적인 용도를 지닌 수공예로 한정되어 전적으로 여자의 손에 맡겨졌고 가내작업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는 예술가들이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 여겨졌으며,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이 분리되면서 예술활동의 담당자 역시 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술사나 사제들이 주로 종교적 예술을 담당했고, 세속적 예술은 여성들에 의해 가내 수공예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엿볼 수 있다.
1.5. 전문직업 또는 가내 수공예로서의 예술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이 분리되면서 아마도 예술활동의 담당자 역시 분화되었을 것이다. 무덤을 장식하는 예술과 우상조각은 주로 남자들, 특히 마술사와 사제들의 소관이 되었다. 이와 달리 세속적인 예술은 순전히 장식적인 용도를 지닌 수공예로 한정되어 전적으로 여자의 손에 맡겨졌고 가내작업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 문화 출현으로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성적이며 다양한, 종래의 형식과 전형의 속박에서 훨씬 벗어난 양식이 나타나지만 전통적인 종교 및 예술의 형식을 가능한 한 불변의 상태로 유지시키고자 노력한 사회 기득권층( 왕과 사제들)의 정치적 강제 때문에 신석기 때부터 내려온 정적,보수적 요인이 병존 하고 있었다. 가내 수공업 제품을 논외로 한다면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사제와 왕의 수요에 따른 일에 국한 되었다.
예술가:손으로 하는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원시적 체면의식에 의하여 예술가의 지위는 상당히 낮은 것이었다.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임을 철저히 강조되고 실용적인 과업에 완전히 몰입 되어 있던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존재 같은 것은 완전히 작품의 이면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집트 중제국시대 예술에서는 형식에 치우친 인습이 생기고 자유의지에 의항 표현형식은 일체 억눌리고 만다. 이때 추상적 예의범절과 관습 및 풍속상의 규범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배경으로 반개인주의적,정태적,안습적 성격을 띈다.
이와 같이 고대 오리엔트, 특히 이집트 예술에서 예술가는 단순히 특별한 신통력을 가진 마술사가 아닌, 사제와 왕의 요구에 따라 엄격한 규범과 전통 속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존재로 평가되었다.
1.6.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예술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예술 활동도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신석기 시대까지만 해도 예술 활동은 주로 가내 수공예의 형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술은 가내 작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전문가의 손으로 옮겨갔다. 이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특별한 신통력을 가진 마술사가 아니었다.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주로 사제와 왕의 수요에 따라 생산되었다. 두 계급 모두 장엄하고 권위를 상징하며 현실과의 격차가 뚜렷한 양식화된 묘사를 예술에 요구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예술은 아름다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사원과 궁전을 중심으로 통제를 받으며 생산되었다.
예술가의 지위도 상당히 낮았다. 손으로 하는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 속에서 예술가는 실용적인 과업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고, 예술가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작품의 이면으로 사라졌다.
중제국 시대의 이집트 예술에서는 형식에 치우친 인습이 생겨나고 자유의지에 의한 표현이 억압되었다. 추상적 예의범절과 관습, 풍속상의 규범을 중시하는 세계관 때문에 반개인주의적이고 정태적이며 안습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이집트 예술의 특징이었던 합리주의적 형식 원리, 특히 '정면성'의 원리와 '정석적' 형식도 이 시기에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아메노피스 4세 치하에서는 이러한 양식에 대한 혁신적 시도가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를 예술의 목표로 내세워 의고풍 예술 양식에 맞서는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정적이고 의례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메소포타미아 예술은 이집트 예술보다 더 엄격한 규율에 매여 있었고, 변화나 신선함이 적었다. 이들은 완전무결하며 이치에 맞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시리아 예술에서는 이집트 아메노피스 4세 치하와 유사한 이원적 대립 양식이 나타났다.
끄리띠 문화에서도 종교가 비교적 가벼운 역할을 했고, 외국과의 교역 등으로 발달한 도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의 예술은 왕과 지배계급의 예술이었지만, 모티프의 풍부함과 다채로움, 회화적인 구도에서 다른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구분되는 특성을 보였다.
이처럼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예술은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발맞추어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특히 도시 문화의 등장은 예술 활동의 주체와 양식, 기능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 이집트 예술의 특징
이집트 예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 예술은 도시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가내 수공업을 벗어나 전문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제와 왕의 수요에 따라 제작된 예술품들은 장엄하고 권위를 상징하는 양식화된 모습이었다. 이는 사제와 왕들이 자신들의 보수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수단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작품의 이면으로 숨겨야 했으며, 천하게 여겨졌다.
이집트 예술의 특징으로는 첫째, 정면성의 원리와 정석적 형식을 들 수 있다.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채 완전히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둘째,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표현보다는 반개인주의적·정태적·안습적 성격이 강했다. 이는 당시의 추상적 예의범절과 관습, 규범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셋째, 극단적인 양식화와 경직성을 보였다. 원근법, 생략법, 중첩법 등을 포기하고 오히려 더 심한 경직된 금기사항을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집트 예술의 특징은 궁정예술과 종교예술이 주도적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도시와 시장의 발달,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등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보수적인 사제와 왕들의 정치적 강제로 인해 전통적인 정적이고 보수적인 요소가 여전히 병존하고 있었다.
1.8. 중제국시대 이집트 예술의 변화
중제국시대 이집트 예술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중제국시대의 예술은 전성기 고대왕국시대의 예술과 달리 보다 추상적이고 양식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집트 예술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보수주의와 전통주의적 경향은 중제국시대에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왕과 사제들의 정치적 강제로 인해 전통적인 종교 및 예술의 형식을 불변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기 이집트 예술의 특징은 추상적 예의범절과 관습 및 풍속상의 규범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반개인주의적, 정태적, 안습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원근법, 생략법, 중첩법 등의 합리적인 묘사방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