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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1. 95개조 논제와 비텐베르크 교회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이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와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당시 성직자와 성도들의 관심을 끌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곧바로 출판업자들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신속하게 전파되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중요한 장소이다. 이 교회는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로 평가된다.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 붙인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도시 비텐베르크에 위치해 있으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져 '루터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매년 수많은 순례객이 찾는 역사적 현장이다.
루터는 1524년 비텐베르크 성 교회가 카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전환되면서 교단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교회 문에 영원히 각인되어 남아있다. 이처럼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상징적인 장소라 할 수 있다.
1.2. 루터의 도시와 만인 제사장 교리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자신의 95개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이 도시는 루터가 수도생활을 하며 활동한 곳으로, 루터의 도시라고 불린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독일어로 설교하며 만인제사장 교리를 주장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는 성직자에게만 허락되었던 성경 해석의 권한을 모든 신자에게 부여하는 "만인제사장 교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각자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통해 개인의 신앙과 신성한 성경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중요시했다.
루터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성서를 직접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당시의 유교적 위계질서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주의에 도전했다. 이는 개인의 신앙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판단을 이끌어내며 근대 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다고 평가된다.
1.3.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6세기가 왔다. 1000년 유럽 지성사를 억누르던 천동설이 폐기됐다.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출간한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적 탐구와 탐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기존의 천동설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관찰보다 수학적 일관성을 더 중요시하여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천문학과 우주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는 기독교 성경 구절에 갇혀 있던 유럽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해방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입증하자, 가톨릭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했고, 갈릴레이 또한 종교재판을 받아 고문을 당하는 등 박해를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1992년 10월 31일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2010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