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중원역사문화론 호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충주의 역사와 문화
1.1. 충주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
1.2. 충주 지역의 선사문화와 고대문화
1.3. 삼국시대 중원지역의 역할과 변천
1.4. 고려시대 충주의 역할과 항쟁의 역사
1.5. 조선시대 이후 충주의 문화와 전통
2. 충주의 주요 유적지와 문화유산
2.1. 충렬사와 임경업 장군
2.2. 단호사와 철불좌상
2.3. 호암지 지역의 청동기 유물
2.4. 호암 택지 토성 유적
2.5. 중원고구려비
3. 충주의 자연관광 자원
3.1. 월악산 국립공원
3.2. 송계계곡과 충주호
3.3. 계명산 자연휴양림
4. 충주의 온천관광
4.1. 수안보 온천의 역사와 특징
4.2. 수안보 온천의 효능과 치유 효과
5. 충주의 레저 문화
5.1. 사조 리조트 스키장
6. 충주의 문화기행
6.1. 충주박물관과 중원문화
6.2. 남한강 수석전시관
7.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충주의 역사와 문화
1.1. 충주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
충주는 충청북도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과거 선사시대부터 남한강의 물줄기가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북한강과 합쳐 서해로 흘러가는 중심에 있다. 남한강의 본류와 달천, 요도천, 봉황천 등의 유역에 형성된 충적 지대는 선사시대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이 지역의 풍부한 철(鐵)자원과 하천유역의 충적 대지가 주는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변 지역보다 유리한 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중원으로 불리며 국토의 중앙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1.2. 충주 지역의 선사문화와 고대문화
충주 지역의 선사문화와 고대문화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우선 선사시대의 경우, 충주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된 중원 지역에 해당한다. 충주 용탄동, 금능동 유적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강 수변지역 발굴 유적의 1/4 가량이 이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당시 이 지역이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구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이 중심지역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에도 충주 조동리, 명서리, 하천리 유적이 발견되는 등 선사문화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에는 충주 지동리에서 널무덤이 발굴되어, 이 지역이 청동기, 초기 철기문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고대사에서도 충주 지역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세기 경 고구려가 이 지역을 국원성으로 지칭하며 남방 진출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음이 고구려비를 통해 확인된다.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확보하면서 국원소경, 중원소경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던 이 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충주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중심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가 발달하고 교류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충주 지역의 선사문화와 고대문화는 현재까지 많은 유적과 유물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3. 삼국시대 중원지역의 역할과 변천
삼국시대에 충주 중원지역은 높은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으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졌다.
백제는 현재 충주시 칠금동 일대에 제철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이를 남한강을 통해 수도 위례성으로 운송하였다. 중원지역은 충분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남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백제와 충돌하였다. 고구려는 충주를 점령하고 이를 '국원성'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 "나라의 처음 본디가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이곳을 남방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되찾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이후 중원지역까지 점령하며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다. 신라는 충주를 '국원소경', '중원소경'이라 명명하며 이곳을 경주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충주 중원지역은 삼국 간 치열한 각축전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이 지역이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풍부한 철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삼국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결과적으로 신라가 통일기 이후 중원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4. 고려시대 충주의 역할과 항쟁의 역사
고려시대 충주는 삼국시대 이후로도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고려 고종 18년부터 46년까지 (1231~1259) 6회에 걸쳐 전국을 유린하며 30여년간을 지속한 몽고의 빈번한 침략에 이곳 충주성만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김윤후 장군의 훌륭한 지도력과 타민족으로부터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중원인의 투철한 애향의식과 강인한 정신이 결합된 결과로 평가된다. 이처럼 충주는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고려 왕실을 보호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에도 충주는 격렬한 항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신립 장군이 탄금대 배수진 싸움에서 패하였지만, 조웅, 조덕공 등의 의병활동으로 수많은 왜군을 격살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방인관, 유완호, 백남규, 정낙인, 김돌석, 조화영, 김옥진 등의 의병들이 일제에 끊...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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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진흥사업 조선왕조실록 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불교신문
국가문화유산 포털
충주 지역 역사 콘텐츠의 스토리텔링 화방 안 (2014, 12)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홍성화 교수 논문)
충주 호암동, 세형동검 및 잔줄무늬거울 등 청동기 유물 다량 출토, 이가온 기자 2015.01.20. (서울문화투데이)
한국 중기 무문토기 문화의 사회구조와 상징체계-송국리 유적 형성과정에 대한 심층 기술(thick description)적 접근, (1~35p) 2p 김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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