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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고와 장고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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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생성일 202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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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소개글

"요고와 장고의 유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요고와 장고의 역사
1.1. 요고의 의미와 역사
1.2. 백제와 통일신라의 요고
1.3. 장고의 의미와 역사
1.4. 고려와 조선의 장고

2. 나례, 성황제, 두레 및 재인청
2.1. 나례의 의미와 형식
2.2. 성황제의 의미와 역사
2.3. 두레의 의미와 특성
2.4. 재인청의 의미와 구조

3. 풍물
3.1. 풍물굿의 개념
3.2. 풍물의 기원
3.3. 풍물의 변천과정
3.4. 풍물을 바로보는 시각

4. 판굿
4.1. 판굿에 대해서
4.2. 지역에 따른 판굿
4.3. 풍물의 가락

5. 악기
5.1. 징
5.2. 북
5.3. 장구
5.4. 꽹과리
5.5. 소고

6. 합주형태의 음악극
6.1. 사물놀이
6.1.1. 사물놀이의 유래
6.1.2. 사물놀이의 정의
6.1.3. 사물의 명칭과 유래
6.2. 태평소(호적 시나위)
6.3. 시나위
6.4. 농악

7. 소리극
7.1. 뺑파전(창극)의 특징

8.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요고와 장고의 역사
1.1. 요고의 의미와 역사

요고(腰鼓)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타악기로서, 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신라의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기 등 여러 유물에서 요고를 묘사한 그림이나 부조를 찾을 수 있다. "세"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크기는 매우 작다. 몸통 양편에 북면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때 북면을 연결하는 몸통은 불룩한 형태이며 연주자는 이 몸통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에는 진도 앞바다에서 요고가 최초로 발굴되었고, 2017년에는 세종시에서 백제의 요고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요고의 사용은 늦어도 5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요고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 백제와 통일신라의 요고

백제와 관련한 기록에서 요고라는 명칭이 정확히 사용된 것은 없으며, 다만 일부 고려 시대 기록에서 백제에서는 일곱 가지 악기 – 고(鼓, 타악기)·각(角, 뿔로 만든 관악기)·공후(箜篌, 서양의 하프와 유사한 현악기), 쟁(箏, 목재로 된 긴 현악기), 우(竽 , 관악기), 지(篪, 가로로 부는 관악기), 적(笛, 관악기)가 사용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다만 백제 7세기 유물인 백제부관 부조에서 요고와 비슷한 형태의 악기를 목격할 수 있어, 비록 백제의 7악기 중 "고"와 "요고"가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확답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요고형 악기가 백제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요고는 통일신라 시대까지 수용된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 유물에서도 계속적으로 요고가 확인된다. 요고와 유사한 악기인 갈고 등도 고려시대에 등장한 기록이 있어 요고가 점차 변화하여 장고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와 통일신라 시대에 요고가 사용되었고, 점차 발전하여 장고의 형태로 바뀌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1.3. 장고의 의미와 역사

장고(杖鼓)란 장구라고도 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타악기이자 절주악기에 해당한다. 장고는 통 두 개를 연결한 몸통을 갖고 있으며, 이 몸통의 양편에 가죽을 메어 때릴 수 있는 면을 만든다. 오른손은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잡고 오른편의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또는 궁굴채(끝에 동그란 나무공이를 단 채)로 북편을 치는 형태이다 – 정악에서는 맨손으로 북편을 치고, 농악에서는 궁굴채로 북편을 친다.

장고 또는 장구의 원형은 요고로 보며,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이어졌던 요고가 점차 그 크기가 커지면서 장고형으로 변해갔던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요고와 관련한 기록이나 유물에서 요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가 오늘날 장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점 역시 요고를 장고의 원형으로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장고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해당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장고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종 30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를 담당하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 음악에서 장고를 편성하여 사용하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고 청자로 만든 장고와 흑유로 만든 장고 등 여러 장고가 고려 시대 유물로서 현전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23곳에서 장고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데,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서도 장고의 유래와 장고의 연주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악학궤범』이 묘사하는 장고는 오른손에 채를 잡고 왼쪽을 손으로 쳐서 연주하는 타악기로, 이미 성종 시대에 장고 열채를 잡고 두드리는 연주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고의 연주법이 "쌍(합장단)", "편(채편)", "고(북편)", "요(굴림채)"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장고와 연주되는 방식과 같은 "덩(쌍, 북편과 채편을 모두 치는 연주법(", "덕(편, 채로 채편을 치는 연주법)", "쿵(고, 손 또는 궁굴채로 북편을 치는 연주법)", "더러러(요, 채편을 가늘게 여러 번 떨면서 치는 연주법)" 등의 장고 연주법이 이미 이 시대에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 고려와 조선의 장고

고려 시대의 장고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문종 30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를 담당하는 장고업사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였다는 점에서 장고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왕실 음악에서 장고가 편성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와 흑유로 만든 장고 등 여러 종류의 장고 유물이 고려 시대에 제작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시대의 장고는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당시 장고의 연주법이 "쌍(합장단)", "편(채편)", "고(북편)", "요(굴림채)"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장고 연주에서 사용되는 "덩(쌍, 북편과 채편을 모두 치는 연주법)", "덕(편, 채로 채편을 치는 연주법)", "쿵(고, 손 또는 궁굴채로 북편을 치는 연주법)", "더러러(요, 채편을 가늘게 여러 번 떨면서 치는 연주법)" 등의 연주법이 이미 성종 시대에 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이르러 오늘날 장고 연주법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나례, 성황제, 두레 및 재인청
2.1. 나례의 의미와 형식

나례(儺禮)는 잡귀를 쫓아내기 위한 벽사(辟邪) 의례로, 매년 음력 섣달 그믐마다 궁궐에서 치러졌다. 나례는 음악과 춤, 폭죽을 모두 동반하는데 특히 붉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쓰며 춤을 추는 등으로 축귀(逐鬼)의 목적이 뚜렷한 행위가 함께 치러졌다.

벽사 행위를 대표하는 무용 중 하나인 처용무가 나례에서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동물 또는 동물을 대신하는 인형을 희생양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유교를 국본으로 삼는 조선 시대에 궁중 나례가 폐지될 것이 여러 번 논의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중기까지 "대나", 즉 대대적인 나례 행사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 비록 그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나례는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나례는 섣달 그믐만이 아니라 왕실 행차, 관리 부임 등 축하가 필요한 행사에서 행해지기도 하는 등, 점차 벽사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연희 내지 놀이로 변화하게 되었고 나례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민가의 광대, 재인, 희자 , 기녀 등이 담당하게 되는 바 이 시기에는 나례를 "나희"나 "잡희"라고 부르게 된다.


2.2. 성황제의 의미와 역사

서낭제라 흔히 불리는 성황제(城隍祭)는 마을 단위로 거행되던 신앙 행위이자 제의(Ritual)이다. 마을 공동체가 함께 모시는 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지내는 제사인데, 성황제 내지 서낭제에 대해서는 그 유래에 대하여 몇 가지 다툼이 있고 일반적으로 서낭제가 아니라 성황제라고 할 때에는 중국의 성황 신앙에 영향을 받은 행위로 본다.

성황 신앙은 한반도의 삼국시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발달한 신앙 중 하나이다.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게 되었고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고려는 송나라와 그 교류가 매우 활발했기에 이러한 교류를 통해 성황 신앙이 건너온 것으로 본다.

특히 고려에 성황 신앙에 전해질 적에 그 신앙은 지역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나며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의 형태로 전해진 바, 이것이 고려 시대에부터 성황제로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는 지방 호족들이 성주로서 권위를 갖고 있던 시대였으며 왕권과 지방권이 계속하여 대립하는 정치적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호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계속하여 과시하고 지역 거주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호족이 무가와 함께 이러한 제의를 집전함으로써 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한편 지역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지역 내에서의 권력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왕정제가 확실하게 확립되었던 시기이며 또한 유교 교리에 맞는 유교적 제의들이 중시되면서 성황제 역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성황제는 왕이 임명한 관리에 의해 집전되는 바익으로 치러졌으며, 또한 성황제의 절차, 시기,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이에 따라 "국행(國行)"의 형태로 진행되게 되었다. 한편 민간이 직접 행하는 성황제 역시 이와 벼개로 진행되어, 지방의 주민들이나 무당이 직접 주도하는 성황제가 특히 조선 후기에 매우 흥하게 되었다.


2.3. 두레의 의미와 특성

두레는 농촌에서 농사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조직한 지역 조직이다. 두레의 어원으로는 "드레", "드리", "드로" 등 납입(Input)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는 설과, 조직 내지 전체를 의미하는 "두르다"라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두레가 정착된 시기는 이앙법이 보편화된 조선 후기로, 이처럼 이앙법에 따라 농사를 지을 경우 다수의 손길이 집약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있는데, 이러한 농번기에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집단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농사의 효율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외에도 여성들은 길쌈을 함께 하기 위한 길쌈 두레를 조직하기도 했고, 남성들은 삼 농사를 함께 짓기 위한 삼 두레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동 노동을 위해 조직된 두레는 조직 전체의 놀이를 즐기는 공동 ...


참고 자료

조석연, 한국 요고(腰鼓)의 기원에 관한 연구, 음악과 문화, 2011
서울신문, 진도 앞바다서 되살아난 전설의 악기 ‘요고’, 2014.1.24.
조선일보, "동아시아서 가장 이른 시기의 腰鼓, 세종시서 나왔다", 2017.4.7.

-http://www.woorimadang.or.kr/
-http://www.sori.jeonbuk.kr
-http://www.doodrock.co.kr
-http://www.samuln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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