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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형도의 생애 및 작품 활동
1.1. 가족과 성장 배경
기형도는 1960년 3월 13일(음력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기우민의 고향은 연평도에서 건너다보이는 황해도 벽성군이었다. 6·25 전쟁을 만나 당시 황해도 피난민의 주된 이동로인 연평도로 건너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섬을 떠났지만, 기형도의 부친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며 이곳에 정착하였다. 1964년에 기형도의 가족은 연평을 떠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하였다.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철거민과 수재민들이 정착하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 지역이기도 했다. 기형도가 성장한 이 지역은 다양한 계층과 생활상이 공존하는 곳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형도는 피난민 가정의 호랑이 같은 막내로 태어났으며, 연평도에서 시흥으로의 이사를 거치며 다양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1.2. 중고등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기형도는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967년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상장을 라면 박스에 담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1973년에는 신림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는 졸업생 대표가 되기도 했다.
1976년 2월, 기형도는 신림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3월에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교내 중창단 "목동" 2기의 바리톤으로 활동했다. 비록 문학 서클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백일장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1979년 2월, 기형도는 중앙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학업에 매진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시기였다. 특히 성적이 매우 뛰어나 상장을 가득 받을 정도였다. 또한 음악 활동과 백일장 수상 등을 통해 문학적 재능도 엿볼 수 있었다. 이처럼 기형도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업과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
1.3. 대학생 시절과 문학 입문
대학생 시절, 기형도는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교내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었다. 1979년 12월에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되면서 문단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며 그 시기를 '80년의 봄'으로 표현할 만큼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야 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하여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대학생 시절 기형도는 문학적 역량을 키우며 동시에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1.4. 신문사 입사와 작품 활동
기형도는 1984년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신문사에서는 수습 기자로 시작하여 정치부로 배속되었다.
1985년 이후 기형도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는데, 「전문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늙은 사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백야」, 「밤눈」, 「오래된 서적」, 「어느 푸른 저녁」 등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는 신문사 입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다양한 작품들을 내놓게 되었다.
1986년에는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며 문학과 출판 관련 작업을 담당하면서 「위험한 가계 1969」, 「조치원」, 「집시의 시집」, 「바람은 그대 쪽으로」, 「포도밭 묘지 1, 2」, 「숲으로 된 성벽」 등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 기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