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역사 속의 육류 문화
1.1. 서론
최근 폭등하는 물가로 인해, 식재료에 대한 소비의 부담이 커지며 삼겹살 한 근이 폭등한 물가를 상징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경제 발전의 위축은 자연스레 서민의 지갑을 얇게 만들고 있다. 언제부터 삼겹살이 우리의 생활지표를 나타내게 되었을까. 사실, 삼겹살은 저렴하게 서민들이 육류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위였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육류를 그리 즐기지 않으며, 채식 위주의 식단만을 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농경 중심 사회에서 농사에 사용하는 소의 도축을 꺼렸던 것을 보면서 이러한 결론에 다다른 것 같은데,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육류메뉴를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결코 육류를 적게 섭취하지 않았으며, 육류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고조선과 부여 시대의 육류 문화
고조선과 부여 시대의 육류 문화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조선과 부여 시대에는 농경의 발달로 곡물의 섭취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육류 위주의 식생활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부여의 최고 관직은 가축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영고라는 제천행사는 신에게 바치는 사냥감을 통해 육식문화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여의 수렵문화와 샤머니즘적 전통은 고구려와 동예에서도 계승되어 나타났다. 고구려에서는 소를 신성시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대표 음식인 맥적은 돼지고기를 양념으로 버무린 뒤 불에 구운 요리였다. 이처럼 고조선과 부여 시대부터 육류 섭취가 중요한 식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1.3. 고구려의 육류 문화
고구려의 육류 문화는 농경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발전해왔다. 고구려인들은 수렵민족의 특성상 일상생활에서도 사냥을 통해 단백질을 공급받았으며, 이는 곧 육식문화로 이어졌다. 고구려인들은 돼지고기를 많이 섭취하였고, 소고기는 신성시하여 주로 제천행사 때에만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대표적인 음식인 '맥적'은 돼지고기를 양념과 마늘로 재워 구운 것으로, 일반적으로 육류요리에 사용되던 양념들은 고기의 냄새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냉장 시설이 없어 도축한 고기를 장기간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러한 양념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고구려는 수렵민족이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사냥을 통해 군사적 능력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육식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4. 백제의 육류 문화
백제의 육류 문화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가축 사육을 통해 육류를 섭취하였다. 특히 백제의 왕들은 사슴을 신성시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사냥을 통해 획득한 사슴을 희생제물로 사용하였다. 당시 사슴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으며, 이는 백제인들이 자연에 대한 숭배 의식과 함께 육식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제인들은 사냥을 통해 획득한 사슴고기를 주요 육류 식재료로 활용하였으며, 이는 당시 백제의 식생활 문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제의 육류 문화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가축 사육에 기반하여 발전하였으며, 사슴고기를 신성시하는 특징이 있었다.
1.5. 신라의 육류 문화
신라의 육류 문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것을 수용하는 동시에, 포와 젓갈 같은 독특한 육류 가공 기술을 발전시켰다. 신라의 뛰어난 육류 가공 기술은 발달 된 목축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섬에 가축을 풀어 방목하여 주기적으로 육류를 섭취하였는데, 포와 젓갈 같은 육류가공기술은 매우 특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문화권과 시간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육류가공 기술이었다.
과거에는 음식을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매번 육류를 주기적으로 섭취하기 위해 도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인간은 육류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을 창안해 냈고 그것이 젓갈과 포였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의 보르츠는 작은 주머니 하나에 소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처럼 다양한 문화권에서 육류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신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포와 젓갈이 발달하였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더 오랜 기간 육류를 섭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 고려와 조선 시대의 육류 문화
고려 전반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 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조선시대에 사람들 사이에서 우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고려 후반기에는 몽골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육식 문화가 다시 발전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새로운 육류 요리법이 전해져 왔으며, 대표적인 예로 곰탕과 설렁탕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 생산력 향상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금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우금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도 마련하여 단속하려고 하였다. 양반 사대부 일부는 소고기를 금기시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내장이나 부산물 등 값싼 고기로 국이나 탕을 끓여 먹었다. 조선 후기에는 소고기를 이용한 국(탕)이 발달하였는데, 내장으로 만든 양탕, 살코기와 내장을 함께 넣어 만든 고음, 잡탕, 육개장 등이 있었고, 뼈가 붙은 고기로 만든 족탕과 꼬리탕, 살코기만을 넣고 끓인 소고깃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육류 요리들은 현재까지도 꼬리곰탕, 설렁탕, 소고깃국, 육개장, 탕국, 양평해장국, 돼지뼈해장국 등의 형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7. 몽골로부터의 영향
몽골로부터의 영향은 우리나라의 육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육식 중심 식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의 탕반 문화와 같은 대표적인 육류 요리가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은 유목민족으로, 풍부한 가축들로 인해 오랫동안 육식 중심의 식단을 유지해왔다. 특히 소, 양, 말 등의 가축들로부터 고기와 젖, 그리고 혈액 등을 섭취했다. 과거 몽골인들은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말린 고기와 유제품 등을 주로 섭취했다. 이러한 몽골의 육식 문화는 13세기 몽골 제국의 팽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