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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복식의 역사와 특징
1.1. 원시시대 ~ 삼국시대
1.1.1. 고구려 복식
고구려의 복식은 평양 부근과 통구평야 지대에서 발견된 고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머리에 관모를 썼는데, 남자들은 건, 책, 절풍, 입, 변 등을 썼고 여자들은 건귀를 썼다. 북방계 유목민이었던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관모를 쓰는 풍습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바지,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겉옷으로, 삼한시대 이래 왕에서부터 평민까지 입었다. 고구려의 두루마기는 기본형이 곧은 깃에 왼쪽여밈, 좁은 소매였다. 이는 저고리인 유가 길어진 것으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입었다. 상류층에서는 둥근 깃에 오른쪽 여밈, 넓은 소매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저고리는 곧은 깃에 좁은 소매, 왼쪽 여밈으로 되어있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바지는 통이 좁았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은 중국식의 통 넓은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짧은 치맛속에 바지를 덧입었으며, 치마는 무용총 접견도에 보이는 승복용 치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의 옷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서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었으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치마 끝에 선을 둘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복식은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특성을 보이며, 신분과 계급에 따른 상의 하의의 구별이 뚜렷했다.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상류층의 복식과 고유의 북방계 복식이 병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1.2. 백제 복식
백제 복식은 고구려 복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차이점이 있었다. 백제인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착용하였으며, 벽화에서 드러나듯이 남성들은 허리까지 오는 긴 저고리와 넓은 바지를 입었다. 반면 여성들은 짧은 저고리와 긴 주름 치마를 착용하였다.
백제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저고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였고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포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과 고구려 벽화의 인물상 옷이 일치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에서 특이한 점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복식과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기혼녀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는 형태였고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거나 둥그렇게 앉은 뒤 한 가닥은 뒤로 내려뜨려 구별하였다. 남자의 경우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작채를 통해 고구려와 유사한 수계식 상투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백제의 복식은 고구려와 유사한 바지와 저고리 중심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부 세부적인 차이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복의 경우 기혼녀와 미혼녀의 구별이 뚜렷했으며, 남성들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와 넓은 바지를 착용하였다.
1.1.3. 신라 복식
신라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곧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고 필요에 따라 포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이,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의 옷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 모양에서 특이한 사실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양복바지와 같이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에서도 바지 밑단에 가선을 두르거나 부리를 동여매지 않고 입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예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은 기혼녀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는 형태였으며,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거나 땋은 머리를 둥그렇게 앉은 뒤 한 가닥은 뒤로 내려뜨려 기혼녀와 구별이 되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모양은 백제 무녕왕릉에서 작채가 출토된 바 있어,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수계식 상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작채란 머리를 모두 위로 끌어 올린 다음 대각선으로 마주 찔러 머리를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던 비녀를 말한다.
신라의 복식을 보면, 먼저 관모로는 일반인의 경우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의 변형모를 많이 썼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금속제 관모를 예복용으로 썼다. 신라의 의복에서 남자는 허리까지 이르는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바짓부리는 묶여져 있었다. 또한 여자는 허리 아래에 이르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옷차림이 고구려인과 같았다는 것을 뜻한다. 기본 복식 위에 입었던 포도 그 형태가 고구려나 백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이와 화가 함께 착용되었는데, 이는 주로 여자들이 많이 신었고 화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다. 신의 재료도 천,금속제,흙,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어 삼국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신발 문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화가 남녀 모두에게 착용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므로 미에 관심이 많은 여자용의 이처럼 다양한 발달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신라의 복식 생활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의료 수공업의 발달이었다. 이는 일찍이 신라에 [가배]라는 방적기술 연마 풍속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료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산된 것은 마포였고, 가는 견사를 날실로 하고 굵은 견사를 씨실로 해서 짠 비단의 일종인 모초도 생산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의 복식은 남녀 모두 고구려, 백제와 유사한 모습이었지만, 특히 상류층에서의 관모와 화려한 장신구, 그리고 발달한 의료 수공업 등에서 독자적인 특징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2. 통일신라 시대
통일신라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신라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당, 송, 원 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하였다. 왕복을 비롯하여 백관복에 이르기까지의 관복은 송, 중국화된 원, 그리고 명의 제도를 받아 들였으나, 일반의 복장인 우리나라의 고유복식은 서민층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여성복식은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사민(士民)의 처(妻), 기생(妓生)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부용국이 되면서 복식풍습 또한 많이 몽고풍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공민와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에 의한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고풍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고 복식에서 온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기도 하였다. 또 여자 화관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고인의 고고리였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