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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탈춤
1.1. 탈춤의 개요
한국의 탈춤은 민족의 혼과 정신, 그리고 시대상을 반영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탈춤은 약 20여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그 기원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로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탈춤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연기자가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본래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로 분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탈춤은 신앙적인 의미와 해학, 현실풍자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탈놀이의 기원은 농경의례설, 기악설(伎樂說), 산대희설(山臺戱說)의 세가지로 논의되어 왔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과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각종 가면희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재의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드라마로 정립되었다. 산대도감극은 도시형의 탈놀이로, 조선 궁중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의 관장 아래에서 산대라고 불린 무대에서 상연되던 때의 호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1634년에 산대극 상연이 폐지되자, 해산된 연희자들이 민간에 정착하면서 오락을 위한 민속극으로 변모하게 된 것 같다.
1.2. 탈춤의 기원과 유래
탈춤의 기원과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지구상에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탈은 등장했다. 삼라만상 나름으로 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던 정령신앙을 바탕으로 신을 위하며 달래어서 인간에게 복을 바라고 신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 방법으로 탈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춤까지 보태어져 주술적 의미를 더했다.
탈춤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조선 영조 때 이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유래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과 같은 국중대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신에 대한 공연적 성격의 무용 요소와 탈을 쓴 군중의 가무회가 있었다. 백제의 기악, 신라의 황창무·처용무 기원의 향악잡영 5수 중 대면·산예, 고려의 산대잡극 등이 탈춤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오 놀이는 마을굿으로 행해진 서낭제 탈놀음으로 탈춤의 역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대희와 나례희가 계속되어 규식지희·광대소학지희가 발전되었으며, 광대소학지희에서는 탈놀음·인형극·창(唱) 등이 발달했다. 그러나 1634년 도감에서 관장하던 산대극이 공의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나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자들이 민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영조 때 광대들에 의해 민간에서 탈놀음이 연행되면서 민중오락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3. 탈춤의 특징
탈춤은 극의 내용과 탈의 표정을 살리는 동시에 극의 한 단원(과장)을 마무리짓는 구실과, 대사와는 관계없이 예술적이고 흥겨운 춤을 추기도 한다. 춤사위를 비교해 보면, 해서지방의 춤은 대체로 팔목중들의 사위춤(한삼춤)이 주가 되어 타령 장단에 맞추어 춘다. 북방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춤들은 한삼의 휘돌림과 힘찬 도무(跳舞)로 짜여 있으며, 무폭(舞幅)이 커서 마치 악귀를 쫓는 듯한 전투무용적 성격을 보인다. 경기지방 탈춤은 다양하고 잘 정리되어 있으며, 주된 춤사위는 마디마다 신명을 집어넣는 '거드름춤'과 신(멋)을 풀어내는 '깨끼춤'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춤에는 손을 내놓고 추는 춤사위가 많으며, 매듭이 확실한 타령 장단을 쓰기 때문에 동작도 맺고 끊는 매듭춤으로 되어 있다. 영남의 야류나 오광대춤은 '배김새사위'외에는 별다른 춤사위가 없고 즉흥적인 허튼춤을 추는 경우가 많다. 이는 민중적인 춤이 성행한 증거이며, 사물(四物)을 중심으로 한 농악연주로 춤을 추기 때문에, 한층 흥이 나고 구수한 멋이 있다. 춤사위 중에서 몸짓춤을 보면, 방어적인 동작과 악귀를 격퇴시키는 무술적인 동작, 풍년을 기원하는 축원무와 농경행위의 모방동작, 성행위를 상징한 동작, 동물과 사람의 흉내를 통한 풍자 묘사, 그리고 부락인의 단합을 위한 대동춤이 있다. 탈춤사위는 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 맺고, 어르다가 푸는 순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춤에 따라서는 동작의 시작과 끝이 뚜렷한 매듭춤과, 뚜렷하지 않은 유동적인 춤들이 있다. 이러한 춤들은 자연의 모방과 농경행위, 성행위 또는 귀신을 격퇴시키는 무속신앙과 결부된 행위이던 것이 점차 풍자적인 춤 등 민중들의 의지가 담긴 상징동작과 민중적 미감에서 나온 예술적 표현으로 변모하였다.
1.4. 탈춤의 지역별 분포
1.4.1. 봉산탈춤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다가 1915년경 사리원으로 옮겨 전승되던 탈춤으로써, 1967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 근원은 산대도감 계통극의 해서(海西)탈춤에 두고 있는데, 해서지방에서는 거의 모든 5일장터에서 1년에 한번씩 주로 단오에 놀았으며, 원님의 생일, 부임날 같은 관아의 경사, 중국사신 영접 등의 행사에서도 연희되었다고 한다. 봉산은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라는 경제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탈춤공연이 성행하였다.
약 200여년 전 봉산의 이속(吏屬) 안초목(安草木: 첫목[初目]의 와전으로 보임)이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한 뒤로 이속들이 이 놀이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후 해서지방의 대표적인 탈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탈춤은 원래 봉산 구읍 경수대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게 되고 경의선 철도가 개통하게 되자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아래에서 놀게 되었다.
이 탈춤은 다른 지방 탈놀이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개량되었고 명수들의 배역과 뛰어난 연기로 명성을 떨쳤다. 이 놀이는 단오에 악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행사로써, 또 하지 축제로써 행해졌다. 놀이를 위해 단오 1개월 전부터 군민에게서 비용을 거두고 무당에게서 의상을 징발하여 절에 가서 합숙하며 연습을 한다. 사리원으로 옮겨오기 전에 봉산탈춤을 놀았던 봉산 구읍에서는 경수대라는 나지막한 축대를 쌓아 그 위에서 놀았으나, 사리원에서는 경암루 앞 광장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