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일제강점기 이전의 간호관련 사건과 인물
1.1. 근대교육과 간호의 도입
근대교육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국가교육체제로 계획되고 확립되었다. 근대 시기 교육의 본질에 관한 기본논의가 인간 도야와 생명에 초점을 맞추며, 덕?체?지의 균형 발달을 지향하다고 하지만 근대 교육공간으로서 학교는 훈육을 그 핵심원리로 두게 되었고, 근대 교육공간으로서 학교의 모습도 이에 맞춰 변화하였다. 시민혁명과 산업 혁명에 의해 발전된 공교육은 이성이고 자율인 개인, 즉 계몽된 시민의 형성을 과제로 삼았다. 서양의 근대 학교 공간 형성과정이 이렇게 수세기에 걸친 장기 과정이었던 데 반해, 한국의 경우는 개화기와 함께 식민지를 경험하며 매우 급속하게 그리고 강압으로 진전되었다.
갑오개혁에 의한 신학제의 확립은 근대학교의 설립에 박차를 가해 한국교육의 새로운 교육전통을 이룩하게 하였다. 이러한 교육전통은 개화 이래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선교주의 학교에서 근대교육의 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교육의 이념이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근대교육의 시발점도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근대교육은 교육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반(半)식민지교육으로 재편하는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민족감정과 국권회복을 이념으로 하는 민족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많은 사립교육기관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확산되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와 같이 근대적인 교육체계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간호 분야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기존 의녀제도에서 나아가 서양식 의료기관이 설립되면서 간호활동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근대적인 보건의료체계가 형성되고, 간호사라는 전문직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민족선각자들에 의한 근대학교 설립
1.2.1. 원산학사
1880년 4월 원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이 활발한 상업 활동을 시작하자,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외국의 도전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이에 1883년 1월 정현석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가 교육기금을 모집하여 근대 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어윤중과 정헌시의 지원을 받으며 관민이 합심하여 1883년 원산학사를 설립하였다.
원산학사는 종래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근대 최초의 민립학교이다. 이는 외국인의 손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설립되었다는 점, 정부의 개화정책에 앞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아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점, 지방의 개항장에서 시무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원산학사는 본디 지니고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의 기능이 나뉘어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가 되고, 원산 감리서에서 역학당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처음에 원산보통학교로, 나중에는 원산제일국민학교가 되어 1945년까지 존속하였다.
1.2.2. 오산학교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상업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7년 7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민족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민회(新民會)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북 지방 최초의 사립 중학교였던 오산 학교는 1907년 창립 당시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생들에게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초대 교장 백이행에 이어, 1910년 교육주지를 기독교정신으로 고쳐 나부열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맞았으나, 그 후 사정이 생겨 기독교 측과의 관계를 끊었다. 오산 학교에는 여준, 윤기섭, 이광수 등이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학교 출신인 중요 인물로는 김소월, 김기석, 주기철 목사 등이 있다.
1.2.3. 오성학교
1907년 김효영과 손자 홍량 등이 교육 구국을 위하여 초등교육기관으로 이 양산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김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소년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설립되던 해에 면학회와 공동 주최로 하기 사범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강사로 최광옥·김구 및 당시 17세의 이광수도 초대되었다. 이 강습회에는 사숙훈장들과 스님, 백발이 성성한 노인까지 강습생으로 참석하였으며, 멀리 경기도·충청도에서까지 강습생이 몰려와 그 수는 400여 명에 달하였다.
강습회의 주제는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자녀를 교육시키라.'였다. 교과목은 최광옥이 국어·생리학·물리학·식물학·경제원론 등을, 고정화(高貞華)가 한국사를, 이광수가 서양사를 담당하였다. 이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안창호(安昌浩)는 "우리 삼천리강토 13도마다 안악과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다."라고 격찬해 마지 않았다.
제2회 때는 김구의 발의로 모두 삭발을 하기도 하였고, 제3회 때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모여든 청강생이 7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김구는 이들에게 '한국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1909년에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홍량의 발의로 김효영이 낸 3,000원과 지방 유지들의 의연기금 3,000원을 적립하여 중등교육기관인 양산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폭을 넓혔다.
김효영은 일찍부터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 보냈을 뿐 아니라, 양산소학교가 한때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는 익명으로 벼 100석을 기부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양산학교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교육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인력 증강과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이곳 황해도 일대의 민족 지도자와 이에 자극받은 주민들의 배일사상이나 주권 회복에 대한 투철한 자각은 신민회(新民會)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함께 손꼽힐 만큼 발전하였다. 이처럼 양산학교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들어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자, 일제 통감부는 이 학교를 없애고자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1910년 12월에 안명근의 독립운동 자금모금 사건이 일제에게 적발되자, 일제 통감부는 그가 안악에 머무는 동안 양산학교와 해서교육총회 간부들을 두루 만났다는 구실로 이른바 안악사건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양산학교는 폐교 당했다. 이 학교는 해서지방 교육 구국운동의 선봉이 되어 민족의 단합과 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2.4. 대성학교
대성학교는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다.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 방침을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즉,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1909년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