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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잊을 수 없는 6.25 전쟁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7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전쟁은 3년여 간의 격전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한반도에 깊게 남아있다. 특히 이 전쟁의 주요 현장 중 하나였던 낙동강 방어선과 관련하여 창녕지역에서 치열했던 전투 양상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7일까지 약 3주 간 진행된 창녕 전투는 전쟁 초기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1.1. 잊을 수 없는 6.25 전쟁
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최전방에서 계속 공격을 가하며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창녕지역은 낙동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제24사단에게서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낙동강 방어를 위해 제9연대, 제23연대, 제38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31일 북한군 제2, 9사단의 기습으로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당하여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주매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게 되었다. 이후 미 제2사단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적 제2·9사단과 대치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된다.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케이저는 먼저 낙동강 동쪽지역의 적을 격퇴한 후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다음 작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격렬한 공격이 이루어졌고, 16일 새벽 미 제22연대가 적을 물리치는데 성공하면서 전황이 호전되었다. 이후 적의 퇴각이 이어져 17일에는 낙동강 동쪽 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의 적 방어진지 돌파작전이 일단락되었다.
창녕지역의 격전지인 교상리에는 이러한 낙동강 방어전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59년 3월 31일 창녕지구 전투전적비가 세워졌다.
1.2. 6.25 전쟁의 주요 사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낙동강까지 밀리는 대패로 이어졌다. 창녕지역은 낙동강이 흐르는 곳으로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7일까지 미 제2사단과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부대 간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다. 미 제2사단은 제9연대, 제23연대, 제38연대를 배치하여 낙동강 방어에 주력했으나, 8월 31일 북한군의 기습으로 작전지역이 돌파되었다. 이후 9월 1일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낙동강 동쪽으로 양단되었고,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창녕 교상리에 세워진 창녕지구 전투전적비는 이를 기념하고자 세워졌다. 미 제2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