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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청동기시대 개관
청동기시대는 서기전 1000년 대 전반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무문토기와 함께 청동기, 마제석기를 제작 사용한 시대이다. 마을은 장방형 혹은 원형의 수혈 주거지로 구성되고, 무덤은 지석묘, 적석묘, 석곽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벼를 비롯한 곡물 농사가 시작되었고,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는 청동기로 비파형동검 등의 무기와 다뉴기하학문경(다뉴세문경) 등의 의기가 있다. 이들 청동기의 중심지는 요서 지역에서부터 요동 지역을 거쳐 길림, 한반도 지역으로 이행된다.
1.2.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와 비교하여 농업이 발전하고, 청동기 도구가 사용되면서 생산성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계층 분화와 정치적 권력의 집중이 일어나, 군장이라는 지배층이 등장하였다. 군장의 등장은 청동기시대 사회의 복잡성과 중앙집권적 권력 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므로, 그 중요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6-7세기 삼국 간의 관계와 대외항쟁은 삼국의 흥망성쇠를 가져왔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더불어 신라 하대의 동요와 후삼국의 분열은 고려 초의 중앙집권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변화와 계기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역사의 주요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다.
2.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와 군장의 등장
2.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
청동기시대에도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냥, 어로, 채집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의 중심은 농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는 보리, 밀, 콩, 기장, 조, 수수 등 다양한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농경문 청동기에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해 밭을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진주 대평리에서는 고랑과 이랑이 남아 있는 청동기 시대의 밭이 발견되어, 당시의 농경 방식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부여 송국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불에 탄 쌀과 볍씨 자국이 남은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논산 마전리와 울산 무거동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논이 발견되었다. 당시 논은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간단한 보(洑) 같은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조성되었으며, 사각형 혹은 불규칙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벼를 수확할 때는 반달돌칼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벼농사가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시대의 주식은 여전히 밭에서 재배된 기장, 조, 보리, 밀, 콩 등이었으며, 쌀은 부차적인 곡물로 소비되었다. 이와 함께 도토리와 같은 견과류도 채집하여 식량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바위에 그림을 새겼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울주 반구대와 고령 장기리 알터바위 그림이 있다. 울주 반구대 바위에는 고래, 호랑이,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들이 새겨져 있으며, 고령 장기리 알터바위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바위 그림은 사냥과 어로의 성공, 그리고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2.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
청동기 시대에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사람을 군장(君長)이라고 하는데, 군장은 신석기 시대의 부족장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하였다. 청동기시대에 군장이 등장한 것은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에서 중요한 변화를 의미한다.
첫째, 청동기 시대에는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고, 이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계층이 등장했다. 군장은 잉여 생산물을 통제하고 축적하면서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일반 백성과 구별되는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계층 분화는 지배층(군장)과 피지배층(일반 농민, 노동자) 간의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둘째, 군장은 단순한 부족장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이자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인물로 발전했다.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군장은 집단을 통솔하고 전쟁을 지휘하며 대외 교역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