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남자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윤희순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2.1. 윤희순 의사의 가계와 성장 과정
2.2. 의병 지원과 의병 활동
2.3. 정미의병에서의 부녀의병대 활동
2.4. 노학당 창립과 항일교육운동
2.5. 조선독립단 운동
3. 남자현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3.1. 남자현 의사의 가계와 성장 과정
3.2. 만주 망명 준비와 3·1운동 참여
3.3. 서로군정서 활동
3.4. 1920년대 통의부·정의부 활동
3.5. 1931년 이후 외교활동과 의열투쟁
4. 두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위상과 의의
4.1. 역사적 위상
4.2. 의의
5. 결론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조선인이 머문 곳 중 독립운동이 없던 곳은 없다.'는 말이 있다. 해외 한인사회 형성과 민족운동을 공부하면서도 언급했던 이 말은 발표를 마친 후에도 내게 오랜 시간 울림을 주었다.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조선인'이 특별한 소수의 영웅이 아니라, 신분과 성별을 막론한 다수의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4개국이나 되는 나라에 독립운동유적지가 지정되었고, 수많은 조선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모았다. 그리고 그 '조선인'은 성별과 신분을 막론한 것이었다. 독립유공자 여성 포상자 수는 2018년 11월 17일 기준으로 357명이며, 포상 기준이 변화함에 따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해외 한인사회 형성과 민족운동의 발표를 준비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사적지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여성의 이름을 남성에 비하면 비교적 적게 접했다. 또한 통상적으로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유관순, 남자현, 조마리아 정도에서 그친다. 어쩌면, 남성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그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접할 기회가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또한 대중매체에서 다뤄지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하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이와 같은 성적도 우수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의 가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집권 세력에 의해서 변화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이다. 즉, 여성독립운동의 가치를 '대중성을 가졌는가', '포상자 수가 몇 명인가' 등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결코 이 글을 통해 성별에 따른 독립운동가들의 우수성을 비교하여 논하거나, 포상자 수로 그 가치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독립운동은 그런 기준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될 주제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본 글에서는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최초의 여성의병장인 윤희순, 만주 항일투쟁 현장과 의열투쟁에서 활약한 남자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 정정화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그들이 펼쳤던 독립운동에 대해 기술할 예정이다. 또한 이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해 공부하며 가졌던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그들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을 알아볼 예정이다.
2. 윤희순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2.1. 윤희순 의사의 가계와 성장 과정
윤희순 의사는 1860년 6월 25일 화서학파의 이항로 문하생이었던 윤익상의 장녀로 태어났다. 화서학파 집안에서 자란 윤희순 의사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경험하며 외적의 침입은 위정척사상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6세의 나이에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혼인하여 강원도 춘천 남면 발산리에 살게 되었다. 윤희순 의사의 시아버지인 유홍석은 화서학파 출신으로, 1876년 무력으로 문호개방을 강요당하자 개항과 개화정책에 깊은 비통함을 느끼며 상소운동에 참여했다. 한편 윤희순 의사는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했는데, 이로 인해 시아버지는 선비로서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윤희순 의사의 시아버지 유홍석도 참여하였다. 이 때 윤희순 의사도 춘천의병에 함께 종군하고자 하였으나, 시아버지의 반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300일간 치성활동을 하였다. 이후 적극적으로 식량을 준비하며 의병을 지원하고, 각종 '경고문', '안사람 의병가' 등을 작성하여 항일구국의지를 갖게 하였다.
2.2. 의병 지원과 의병 활동
시아버지가 의병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윤희순 의사는 자신의 동네에 와서 식사대접을 강요하던 의병대들에게 성심성의껏 밥을 지어주었다. 사실 처음엔 동리 부녀들이 의병들의 요구에 응하려하지 않았는데, 시아버지를 통해 의병들의 희생정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윤희순 의사가 나서서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이다. 있는 쌀을 다 쓰고도 숯장사가 숯을 사고자 ?О屛塚 쌀까지 몽땅 털어 밥을 해주고 군량까지 따로 챙겨주었다. 의병들에게 밥을 먹였던 날 저녁, 윤의사는 동리 부녀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적극적으로 돕자고 주장하였다. 처음엔 이에 대해 반대가 많았으나 시댁 식구들과 함께 앞장서서 의병들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반대하던 이들도 참여했다. 이 운동은 남성들의 조언이나 후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희순 의사의 지도력과 여성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이 구국운동은 평범했던 여성들이 윤희순 의사에 의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으며, 그녀는 이 정신을 확대하고자 '안사람 의병가' 등을 여러 글을 지었다.
2.3. 정미의병에서의 부녀의병대 활동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의 상황에서 의병전쟁이 다시 일어났다. 시아버지 유홍석 역시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였으나 춘천 의암소에서 패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의병을 모아서 항거하였다. 이때 윤희순 의사가 규합한 부녀 병단 30여명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남자의병들과 함께 여우내 골짜기에서 훈련을 받았다. 부녀의병들의 주된 의병활동은 남자의병들을 지원하는 활동이었으나, 언제든 실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남자 의병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지원 활동으로는 식사, 빨래와 화약을 만드는 일, 의병군자금마련을 위한 일들이었다.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화약을 부녀의병단이 맡...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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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529
김희선. ‘여성 독립운동가 조연에 불과했을까?’. 연합뉴스. 2019.03.08
https://www.yna.co.kr/view/AKR20190308040500502
김희선. ‘3.1운동 100주년: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외에 아는 분 있나요?'’. BBC 코리아. 2019.03.01
https://www.bbc.com/korean/news-47353598
조유빈.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말고도 많았다’. 시사저널. 2018.02.28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082
우리역사넷, “남자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n0720_0010&code=eh_age_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