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가톨릭"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가톨릭 마리아론의 역사
2.1. 기독교 초기 마리아론의 태동
2.2. 테오토코스 논쟁과 에베소 공의회
2.3. 중세 시대의 마리아론
3. 로마가톨릭 마리아론의 주요 교리와 반론
3.1. 마리아 종신 처녀설
3.2. 마리아 무죄 잉태설
3.3. 마리아의 승천
3.4.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
3.5. 천상의 모후
4. 개신교 신학자의 마리아론 이해
4.1. 루터
4.2. 쯔빙글리
4.3. 칼빈
4.4. 칼 바르트
5. 조직신학적 비평
5.1. 신론
5.2. 기독론
5.3. 구원론
5.4. 성령론
5.5. 교회론
6. 결론 및 제언
7.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마리아론은 로마 가톨릭 안에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매우 중요한 신학 이론이자 신앙생활의 근간이 되어온 개념이지만 개신교회 내에서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은 제2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개신교회와도 대화를 통한 화해와 일치를 시도하면서 그것의 일환으로 마리아론을 교회 일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신교회 안에서는 마리아론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적인 요소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구자의 판단으로 볼 때 마리아의 부각은 부계 중심, 남성 위주의 문화에서 여성과 모성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대중들의 신앙심에서 접근이 용이한 대체물이 아니었나 싶다. 가톨릭은 역사적으로 여성 사제의 허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를 대신할 중요한 교리와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마리아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는 대상은 여성들이었을 것이고, 앞으로 여성 사제의 보편화가 되기 전까지 마리아론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기에 일차적으로는 마리아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기독교 역사 이래 마리아론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중요한 교의적 개념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봄으로 마리아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꾀하고자 한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에서는 이를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개신교 신학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또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주요 교리들을 비판해 보고, 동시에 마리아론을 대신할 수 있는 개신교만의 대안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가톨릭 마리아론의 역사
2.1. 기독교 초기 마리아론의 태동
마리아론의 기원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대중신심으로 가장 두드러졌으며,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에 이어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구약과 신약 및 대망과 성취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로마의 카타콤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졌으며,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한 가장 오래된 기도는 250년경에 작성된 '성모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sub tuum praesidium)'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가 고통 받는 인류와 임금들의 임금이자 심판자인 아들 예수 사이를 중개하는 연민 어린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전승을 토대로 마리아의 공경 사상은 서서히 자리 잡아 왔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교의는 아니었다.
2.2. 테오토코스 논쟁과 에베소 공의회
테오토코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테오스(Θε??)'와 출산이라는 뜻의 '토코스(τ?κο?)'라는 두 개의 단어를 합친 합성어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낳은 사람'이 된다. 본래는 남성형 명사이지만, 슬라브어로 번역되었을 때에 여성형으로 명사화가 되었다. 라틴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어인 테오토코스를 라틴어로 '하나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Mater Dei(마테르 데이)'로 번역하여 불렀다. A.D 3세기경부터 여러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리겐은 종종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언급한 초창기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250년경 사모사타의 바울에게 보낸 서간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언급하였다. 330년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370년경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400년경에는 요한 크리소스톰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두 테오토코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특히 닛사의 그레고리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이 정통 신앙의 기준이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테오토코스라는 용어의 사용이 공식적으로 허락되어 선포된 것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강생한 그리스도 안에 분리된 두 개의 위격, 즉 신격과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마리아는 신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신성과 결합된 인간을 낳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테오토코스 대신 '크리스토토코스'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서 인성을 지닌 존재이면서 또한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비록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인성만 낳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그러한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 두 가지 본성이 완전하게 결합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에베소 공의회(431년)가 소집되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선언되면서, 에베소 신경에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후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한 칼케돈 신경을 통해 다시 한 번 정통 교리로 확립된다. 따라서 테오토코스 논쟁과 에베소 공의회를 통해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3. 중세 시대의 마리아론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모 신심은 시리아의 성 에프렘,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등 성모 신심가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성장하여 한 차원 크게 발전하였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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