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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의 전교에 비춰본 한국교회사

백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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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등록일
2022.12.06
최종 저작일
2018.04
12페이지/한글파일 한컴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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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로마 카톨릭교의 전교와 그 수난
2.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첫날
3. 한국 민족교회 형성과정과 그 수난
4. 도전 속에서 모색하는 민족 신앙
5. 격동 속에서 표현된 빗나간 신앙의 유형들
6. 신사참배와 교회의 고난
7. 교회 분열과 민족사
8. 오늘의 한국교회
9. 결론

본문내용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근세 이전부터 한국과 접촉해 왔다. 당나라를 통해서 그 접촉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십자가상을 비롯한 사료에 의해서 연구되고 있는가 하면, 몽고를 통해서 프란시스파의 루브르크(Wm. Rubruc)가 전해졌을 가능성,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고시니 유키나가)을 따라왔던 예수회파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aspedes)의 사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체계적인 한국 선교의 시작은 1784년부터라 할 수 있다. 그 해 이승훈이 북경에서 스스로 믿어, 세례를 받아 베드로라는 영세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한 백여년을 걸친 여러 실학자들의 계속적인 서학(西學) 연구의 한 줄기였다고 볼 수 있었을 만큼 한국의 카톨릭교와의 접촉은 시간이 오래되었다.
1785년. 이벽, 권철신, 정약용과 함께 이들은 서울 진고개의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교회사 그 첫 페이지를 열었다. 교리의 정확한 전수가 보장되지 못한 곳에서 이들 신앙 정통의 식별은 어려웠을 테지만 일단 출발은 하게 된 것이다. 시작이 순탄치마는 않았다. 교회가 가는 곳에 박해는 늘 있어왔다. 김범우가 잡혀서 충청도 단양에 갔고(1785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숭배를 이행하지 않았다 해서 사형을 당했다(1791). 이는 선비의 이교 전향에 자극받은 어찌보면 당연한 조정의 처사였다.
최초의 전국적 박해는 1801년(신유년)에 터졌다. 이것은 서학 자체의 대한 동기보다도 정조(正祖)서거 이후의 어지러운 나라사정 때문이었다.
대왕대비의 금사교서에는 기독교가 ‘무부무군의 사교요, 인륜을 위해하는 비도’라는 탄핵이 가혹하게 쓰여 있었다. 이가환의 투옥, 정약용의 유배,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군문효수는 다만 숱한 유혈의 한 실례에 불과했다. 그 후 많은 박해가 있었다. 황사영은 박해에 대응하여 수백척 군함과 수만 군사를 파견 요청하는 밀서를 보내다가 덜미를 잡힌다.

참고 자료

없음
백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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