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남북조불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위진 남북조 시대 불교의 발전
1.1. 중국 역사상 혼란기였던 위진 남북조 시대
1.2. 중국 불교의 발전
1.2.1. 격의(格義)불교의 등장
1.2.2. 강북과 강남의 불교 차이
1.2.2.1. 강북 불교의 융성과 특징
1.2.2.2. 강남 귀족 불교의 전개
1.2.3. 불교와 국가권력과의 관계
1.3. 남북조 불교가 끼친 영향
2. 위진 남북조 시대의 도가와 불교의 결합
2.1. 현학의 등장 배경과 원인
2.2. 주요 현학 사상가들
2.2.1. 정시 현학 시기: 하안, 왕필
2.2.2. 죽림 현학 시기: 완적, 혜강
2.2.3. 원강 현학 시기: 배위, 곽상
2.2.4. 동진 현학 시기: 장잠
2.3. 불교 수용의 배경과 원인
2.3.1. 사회적 요인
2.3.2. 사상적 요인
2.3.3. 불교의 수용 과정과 특징
3. 중국화된 불교의 특성
3.1. 삼세인과설의 등장
3.2. 중국 전통 사상과의 마찰
3.2.1. 효행 문제
3.2.2. 불교측의 대응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위진 남북조 시대 불교의 발전
1.1. 중국 역사상 혼란기였던 위진 남북조 시대
위진 남북조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 중 하나였다. 후한 왕조의 멸망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남방에는 한족이 지배하고 북방에는 소수 민족이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왕조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한족 통치자들은 중원을 상실하고 강남 지역으로 밀려났지만, 그들의 전통 문화와 사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반면 북방의 소수 민족 지배자들은 중화 문화에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불교와 같은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불교는 남북 지역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북방의 호족 지배자들은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불교가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 반면 강남의 한족 지배층은 전통 유교 문화에 더 충실했고, 불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배타적이었다. 이에 따라 강북과 강남의 불교 발전 양상은 크게 달랐다.
이처럼 위진 남북조 시대는 정치적 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기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불교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1.2. 중국 불교의 발전
1.2.1. 격의(格義)불교의 등장
격의(格義)불교의 등장은 중국 불교가 중국 전통사상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노장의 개념을 활용하여 불교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불교 교리를 중국인들에게 친숙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중국인들이 기존에 익숙했던 개념들을 통해 새로운 불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본무의(本無義)", "심무의(心無義)", "즉색무(卽色無)" 등의 개념은 노장의 "무(無)"를 통해 불교의 "공(空)"을 설명하고자 한 시도였다. 노장의 개념을 차용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적으로 재해석한 격의불교는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 사상이 중국 문화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융합 노력을 통해 불교는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이다.
1.2.2. 강북과 강남의 불교 차이
1.2.2.1. 강북 불교의 융성과 특징
북위불교는 크게 융성하였는데, 특히 교단의 발전이 눈부셨다. 동진시대에 이어 크게 발전하게 된 북위 불교의 세력은 강남 불교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북위의 도무제를 비롯하여 명원제, 효문제와 선무제 등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정치적 필요와 개인적 신앙으로 불교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호의적인 불교정책 아래에서 북위불교는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특히 북위불교는 교단의 발전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타내었다. 문헌에 따르면 당시 북위에는 약 3만 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려의 수도 약 2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교단이 크게 팽창한 것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 북방 호족들이 불교에 깊이 의지하였다는 점이다. 북위의 통치자들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교 이데올로기보다는 불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불교는 중원 한족 문화와는 다른 이민족 문화의 상징이자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후원하고 보호하였다.
둘째, 불교가 당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요한 사회통합의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오호십육국 시기 이래 중국의 북방은 한족과 이민족이 뒤섞인 다인종 사회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성격의 불교는 이러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의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북방의 호족들은 불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셋째, 불교 교단에 대한 각종 특권과 혜택이 제공되었다는 점이다. 불교 승려에게는 부역과 징병, 그리고 세금 납부에서 면제 특권이 주어졌다. 또한 사원전에는 토지세가 면제되어 경제적 특권 또한 누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불교 교단에 편입되었고, 이는 교단 팽창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의 급속한 팽창은 필연적으로 폐단을 수반하였다. 부역과 징세 면제 특권을 악용하여 탈세와 세금 포탈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하였고, 불교 교단의 타락상이 심각해졌다. 이에 북위 태무제는 불교 교단의 개혁과 축소를 단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북위불교의 융성이 가져온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북위 시기 불교는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2.2.2. 강남 귀족 불교의 전개
강남 지역의 한족 귀족들은 정치적 혼란과 동란 속에서 현학(玄學)에 몰두하며 불교교리를 연구하는 등 지적이고 고답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불교의 교리를 노장사상과 결합시켜 해석하는 데 힘을 기울였는데, 이는 불교 교리를 한족 귀족 사회에 친숙하게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둔(支遁, 314-366)을 들 수 있다. 지둔은 강남 귀족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현학과 불교를 접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노장 사상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교리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현학과 불교의 접점을 찾는 데 용이했다. 지둔은 귀족 사회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를 통해 강남 지역에서 불교가 귀족 문화로 자리잡는 데 일조하였다.
강남 불교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통해 잘 드러난다. 혜원(慧遠,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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