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빈곤의 개념과 실태
1.1. 빈곤의 개념
1.1.1. 절대적 빈곤
절대적 빈곤은 객관적으로 결정한 절대적 최저한도보다 미달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주로 의식주 등 기본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절대빈곤선 개념을 토대로 생존의 의미를 강조하며, 실질경제성장이 계속되어 그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의 숫자도 감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양부족, 주거 문제, 기본 의료 서비스 이용 불가 등이 절대적 빈곤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빈곤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것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수준 유지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
1.1.2. 상대적 빈곤
상대적 빈곤은 동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가지는 것을 말한다"" 즉, 특정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수준과 밀접히 관련된 개념이다. 경제·사회발전에 따라 정책적으로 중시되며 상대적 박탈과 불평등의 개념을 중시한다. 따라서 상대적 빈곤선은 특정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누리는 생활수준에 못미치는 수준을 말하며, 이는 특정 사회의 사회적 관습과 생활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1.1.3. 주관적 빈곤
주관적 빈곤이란 자신이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제3자의 판단에 의해 어떤 객관적인 수준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 수준에서 결정된다.
빈곤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개인이나 가구가 스스로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어떻게 지각하고 있느냐에 따른 주관적 빈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생활수준과 실제적인 욕구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 빈곤은 개인이나 가구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 평가로, 이는 객관적인 소득 수준이나 자산 보유 정도와 다를 수 있다. 자신이 충분한 경제적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 주관적 빈곤으로 인식할 수 있다. 반면에 객관적으로는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주관적 빈곤은 개인의 욕구 수준, 생활습관, 기대수준 등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소득 수준이라도 가족 구성원 수, 질병 유무, 교육 수준 등에 따라 경제적 상황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관 등에 따라서도 주관적 빈곤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주관적 빈곤은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므로, 객관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과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관적 빈곤에 대한 이해와 대응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1.2. 우리나라의 빈민화 과정
1.2.1. 원초적 형성기 (일제시대부터 50년대 말까지)
일제 식민지하의 도시빈민의 형성 시기는 이 시대적 상황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점이 도시빈민 형성의 구체적인 공통원인이 되었다. 식민지하에서 일제의 가혹한 수탈은 당시 인구의 절대다수가 영세빈농으로 퇴적되어 있던 경제상황을 더해 빈곤의 극심화를 재촉하게 되었다. 강제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식민지 본국의 대륙침략을 위한 남한 사회의 국소적이고 군사적인 공업화를 위해 노동력을 인입시키는 작업에서 많은 농민층이 몰락, 유출되어 도시빈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이 인구이동에 관한 것이다. 해방 이후 해외에 나가있던 동포들의 귀환으로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 이러한 형상은 일제시대에 발생한 강제적인 농민유출이 가졌던 모순을 한꺼번에 폭발하게 만들었다. 또한 38선을 기준으로 남북간의 이질적인 정치, 경제, 문화가 다시 남북간의 인구이동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약 200만 이상의 귀환 및 월남인구가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로 인한 실업난, 식량난은 극심해지는데, 당시 실업자수는 110만 명이었으나 이중 64만여명이 귀환 및 월남동포였다.
한국전쟁은 다시 대규모 의 인구이동을 초래하는데 (약 64만명이 월남) 대부분의 피난민은 서울등 대도시지역에 서 정착함으로써 도시빈민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를 '원초적 형성기'라고 규정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권력과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구조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형성이라는것과는 다르게 식민지 상황의 폭압적인 활동과 전후복구의 강제적인 측면에 따른 '미필적 고의(?)'의 측면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1.2.2. 구조적 형성기 (1960 ~ 197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이농인구의 확장으로 1960~1970년대가 구조적 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농업부문에서 국내독점자본의 극대이윤추구와 저임금노동력 확보에 기초한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저임금노동력의 기반은 저농산물 가격정책이라는 부메랑 효과를 가져와 아직도 인구의 다수인 농민층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자본주의화는 계층 구성을 새로이 재편성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농경제 중심의 사회와는 다르게 자본-임노동의 관계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즉, 도시빈민의 형성과정은 자본축적의 과정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농업사회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이농인구들이 공업화의 흡수처가 되었고, 이러한 공장 노동자들로 전화하지 못한 많은 농민들은 도시주변에서 최하층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상대적 과잉인구는 자본가의 유지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부단한 하강을 강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대적 과잉인구는 결국 도시빈민으로의 전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2.3. 80 ~ 90년대 (산업구조조정과 도시빈민의 관계)
80 ~ 90년대 (산업구조조정과 도시빈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70년대의 경제구조의 한계가 표면화되면서 모순점들이 극대화되었다. 주요 위기의 원인은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였다. 79년의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세계경제가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과잉투자된 중화학공업부분의 해외시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축적의 위기를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해결하게 되었다.
80년대 전반기의 이러한 축적위기를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산업의 재조정과 통폐합, 그리고 설비투자의 전환 등)과 3저호황(금리,유가,물가)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3저호황이 막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