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대학교 한국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광해군 재평가
1.1. 서론
1.1.1. 상반된 평가를 가지고 있는 왕
1.1.2.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1.2. 본론
1.2.1. 임진왜란과 광해군
1.2.2. 즉위 직후 전란 복구 활동
1.2.3. 왕권 강화의 열망
1.2.4. 폐모살제
1.2.5.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 외교
1.2.6. 현재까지의 평가
1.3. 결론
1.3.1. 광해군 재평가
2. 영조의 이중성
2.1. 서론
2.1.1. 영조를 재평가하는 이유
2.2. 본론
2.2.1.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즉위
2.2.2. 영조는 어떤 사람인가
2.2.2.1. 왕으로서의 영조와 그 평가
2.2.2.2. 아버지로서의 영조와 그 평가
2.2.3. 영조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 제기
2.2.4. 영조에 대한 나의 해석 및 평가
2.3. 결론
3. 한국역사의 전환점 - 3·1운동
3.1. 선정 이유
3.2. 사건, 사실에 대한 설명
3.3. 사건 이후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3.4. 선택한 사건이 현재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광해군 재평가
1.1. 서론
1.1.1. 상반된 평가를 가지고 있는 왕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이자 인조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국왕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우선 그가 이른바 인조반정을 통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난정을 일삼다가 폐위된 폭군'이자 '혼주(昏主)'로 보는 전통적 인식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광해군을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격변 속에서 이른바 '택민주의'에 입각하여 현명한 외교를 펼쳤지만 결국 당쟁에 희생된 군주'로 보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다.
또한 광해군의 공과(功過)를 분리하여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즉, 명청교체기라는 엄혹한 시기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려 고투했던 광해군의 외교를 '빛'으로 보면서도 그가 영건(營建)사업 등에 몰두하여 사족과 백성들의 반감을 사서 몰락하게 되는 내정을 '그림자'로 보는 것이다.
1.1.2.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면서 동시에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우리가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보는 관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광해군의 업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광해군을 새롭게 재평가해 보고자 한다.
1.2. 본론
1.2.1. 임진왜란과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큰 공을 세웠다. 선조가 의주까지 물러나 삼남 지방을 비롯한 남장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광해군은 영변, 이천 등 평안도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모집, 전투 독려, 군량과 마초 수집·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광해군의 노력은 사족과 하층민에게 없어진 줄 알았던 조정의 건재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가 이끄는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반면 파천하기 급급했고, 끝내는 대책 없이 명으로 귀순하려 했던 선조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능력있는 활약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2.2. 즉위 직후 전란 복구 활동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었던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에 쌀 16말씩만 내도록 하였다. 비록 경기도에서만 실시되었지만, 공물을 마련하느라 고통받던 백성들은 대동법 실시에 큰 환영을 보냈다. 이후 양안과 호적을 새로 작성하여 토지와 백성을 다시 파악하고, 황폐해진 토지를 복구하여 농업을 되살리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전란 때 소실되었던 많은 책들을 다시 간행하고, 의서 '동의보감'을 출간하는 등 서적 편찬 사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광해군은 전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며 조선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2.3. 왕권 강화의 열망
즉위 직후 전란 복구 활동 직후에 광해군을 괴롭혔던 것은 왕권 강화에 대한 조바심이었다. 그의 태생적 한계와 즉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그를 예민하고 소심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다.
실제 왕이 된 다음에 광해군이 보였던 왕권 강화 노력은 거의 집착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가 궁궐 건설에 집착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해군은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 문제를 큰 궁궐을 갖춤으로써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는 선조 말엽에 착공한 창덕궁 공사를 끝낸 데 이어, 경덕궁(경희궁)을 지었고, 또 인경궁도 다시 세웠다.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은 엄청난 공사였다. 인경궁은 그 칸수가 경복궁의 10배나 된다고 했고, 경덕궁 역시 창덕궁과 규모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궁궐을 두 개나 짓는 것은 왜란으로 참혹한 전란을 겪은 뒤 민생 회복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막대한 재정이 투여되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어떤 후유증을 가져오게 될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광해군의 궁궐 공사는 왕권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좋은 방책이 못되었다. 이는 광해군이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왕권을 끊임없이 강화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1.2.4. 폐모살제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인조반정의 명문으로 내세웠던 중 하나가 폐모살제(廢母殺弟)이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윤리를 중시하던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폐모살제의 시작은 '은상인 살해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칠서(七書)라고 불리는 양반가의 박응서 등의 서얼들이 관련된 사건이다. 이들은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서울과 동래의 왜관을 왕래하던 상인을 습격하여 은을 빼앗았다. 박응서는 자신의 화를 모면시켜 주겠다는 대북파 이이첨 등의 유혹에 넘어가 수사 과정에서 "획득한 은으로 군사를 모아 대궐을 습격하고, 국새를 인목대비에게 넘겨 수렴청정케 하다가 영창대군을 추대할 것이며, 역모의 우두머리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다"라고 거짓 진술했다. 이 사건의 결과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영창대군은 유배된 뒤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되었다. 광해군일기는 정항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 인목대비와 관련된 대북파와 서인, 남인들의 대립이 있었다. 대북파는 인목대비가 종사에 죄를 얻어 모자 관계가 이미 끝나 궁궐에 거처할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반발한 서인과 남인 유생들은 인목대비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옮겨지고 사실상 감금 상태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성리학 윤리의 잣대에 의해 은혜를 모...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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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책 읽어드립니다’ - <한중록> 강독
네이버 나무위키 - 영조
유투브 ‘역사 읽어드립니다’ - <사도세자> 편
한국사의이해. 송찬섭, 전덕재, 이익주, 정재훈, 염정섭, 김태웅, 최규진, 박태균 지음. 출판사 : 출판문화원.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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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한국사 7 · 8 : 한국사 더 쉽고 재밌고 생생하게!, 근대 · 현대, 심선민, ㈜북이십일 아울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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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제104주년 3·1절 행사 개최...만세운동 재현, 박동혁, 충청뉴스, 2023.2.22.
왜 3·1운동과 4·19만 헌법 전문에 포함됐나, 매일신문, 홍성걸, 2023.05.19.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두산백과, (없음)
한국사 개념사전, 최인수 외 5인, ㈜북이십일 아울룩, 2015.02.24.
윤석열 3·1절 기념사 ‘논란’…野 “3·1절에 대통령이 할 말인가”, 데일리한국, 최나영, 202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