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월인석보에 관하여
1.1. 월인석보의 개요
월인석보는 조선 세조 때 편찬한 석가의 일대기로,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편한 국한문 혼용체의 불서이다. 월인석보는 1457년 도원군(덕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세조가 편찬하였으며, 전체 2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인석보의 편성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권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 부분은 서로 대응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글자의 크기에 따라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큰 글자, 석보상절 부분은 중간 크기의 글자, 주석 부분은 작은 글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편제와 글자 크기의 차이를 통해 본문과 주석을 구분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월인석보는 세종대 편찬된 두 문헌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단순한 합본이 아니라 상당한 편집이 이루어진 새로운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월인석보에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위치가 바뀌었고, 받침 없는 한자음에 불청불탁의 후음 'ㅇ'이 첨가되는 등 기존 문헌과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또한 협주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도 이루어졌다.
월인석보의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까지 약 13년 동안 진행된 사업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이후 최초로 나온 불경 언해서이자 당시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따라서 월인석보는 불교경전의 수용 태도와 초기 한글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된다.
1.2. 월인석보의 편찬 동기
월인석보의 편찬 동기는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죽자 임금은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세조의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1.3. 월인석보의 편성 및 형식
월인석보의 편성 및 형식은 매우 특징적이다. 월인석보는 세종 때 지어진 《월인천강지곡》과 세조 때 지어진 《석보상절》을 합편하여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월인석보의 본문에는 《월인천강지곡》을 바탕으로 《석보상절》의 해당 내용을 덧붙여 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편성 방식은 《용비어천가》와 유사하다. 다만 《용비어천가》가 노래 한 수마다 주석이 따로따로 붙는 것과 달리, 월인석보는 이야기의 단락에 따라 《월인천강지곡》이 적게는 한 수, 많게는 50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