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도 모르는 기적의 간 청소』는 간에 있는 담석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간의 내부나 외부에 있는 담관에 담석이 생기는 이유와 왜 위험한지 설명한다. 실제로 간과 담낭에 생긴 담석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새로운 담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 미학자본주의와 정동자본주의라고!
- 무엇이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와 21세기의 미학자본주의를 구분하는가?
- 미학자본주의와 정동자본주의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21세기의 노동 · 경제 · 문화 · 개인의 삶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가?
21세기 자본주의의 영웅은 스티브 잡스 또는 일론 머스크이다. 그러나 불과 20년 전만 해도, 자본주의 하면, 우리는 그것에 비판적인 마르크스 그리고 그것의 내적 동력학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려는 막스 베버나 창조적 파괴혁신의 슘페터와 관련해서만 자본주의를 논해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 경제를 주도한 미국 경제의 부상과 관련해 ‘경제학’보다는 ‘경영학’이 자본주의를 둘러싼 담론을 주도해왔다. 그리고 그 담론의 특징을 21세기의 스티브 잡스 식의 ‘천재’ 자본주의와 관련해 준별하자면, 창조성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가장 좋은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는 저임금의 착취와 기계의 최대한의 합리화를 축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했으며, 베버는 ‘합리화’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추세에 ‘윤리’와 ‘정신’을 덧대 마르크스와는 다른 자본주의 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는 합리화를 기본 동력으로 삼고 있다고 전제하는데, 두 사람 모두에게서 자본주의가 ‘창조적’이거나 ‘감정적’, ‘정동적’일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마르크스에게서 그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철창에 비유하는 베버의 입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세에는 신에게서나 가능할 수 있던 creatio ex nihilo, 무에서의 창조를, 잡스가 기계를 대상으로 실현하자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지금까지와는 본색을 완전히 달리하게 되었다. 즉 자본주의 미학과 정동 그리고 창조성을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지금까지 ‘산업화’와 ‘민주화’만 생각해왔지, 창조는 주로 예술의 영역에나 해당된다는 상식에 따라 생각해온 우리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고도 남을 도발적 명제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회사에 전화를 해보기만 해도 저자의 진단이 확증되지 않는가? 우리 가족이 일하고 있으니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니 말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할 때 가령 아방가르드 예술에서처럼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머물던 창조성이 어떻게 잡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일종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경영학 담론, 자아심리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추적하고 있다. 저자의 빼어난 진단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온 바의 예술의 본질이나 역사, 심리 분석이나 심리 상담에 대해 전혀 다른 역사적 ㆍ 체계적 분석을 제공한다.
■ 창조성, 우리의 새로운 구세주인가 새로운 지배 메커니즘인가?
- 기존의 인간의 기술적, 지식적 기능을 대체하는 AI의 일상화와 함께 창조성은 인간의 해방자가 될 것인가 구속자가 될 것인가?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라며 한 명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되었다는 재벌 회장의 창조성 예찬부터 중국의 축구 굴기 그리고 ‘뭐 좀 더 재미있는 생각 없어?’라는 일상어까지 우리는 창조성이 마치 하나의 장치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금쪽이의 심리 상담으로 유명한 한 여성 상담사가 레거시 미디어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의 주요 인물을 모두 제치고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적 인물로 선정된 바 있기도 하다.
저자 주장에 따르면 ‘자아성장심리학‘의 한 갈래를 대변하는 ‘I can do it’의 사회적 멘탈리티가 근대의 모든 제도, 가령 학교나 부모 등을 압도하고,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거꾸로 학교와 가족 등은 개인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문제 많은 제도나 장치라는 것이다. 원래 창조적인 개인의 역량을, 부모가 잘못 기르거나 사회가 잘못 훈련시켜 창조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런 식으로 ‘창조성’은 근대의 ‘억압적인’ 제도들을 대체하는 장치로서 자리 잡으며, 결국 ‘창조성’은 사회를 집단적으로 사로잡는 히스테리가 된다.
창조성은 중세라면 신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르네상스라면 다빈치 같은 예술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예술가의 작업을 기계로 대체한 자본주의는 예술과 창조성을 주변부로 몰아냈고, 19세기 중반의 보헤미안은 그에 반항했다. 벤야민 또한 자본주의 기술이 예술마저 기술적 복제 대상으로 삼는다며 비판적 입장을 보인 반면, 앤디 워홀은 기술적 복제를 이중적으로 다시 뒤집어 예술작품으로 변증법적으로 전도시켰다.
하지만 모두 자본주의와 창조성을 적대적 관계로 보았지 상보적이거나 내포적 관계로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자본주의의 우상은 이제 ‘창조성’이 되었으며, 그것은 우리를 심리적, 제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장치가 되었다.
게다가 최근의 ‘지브리풍 그림’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적 창조성과 기계적 복제성은 일종의 샴쌍둥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보다 더 혼란스럽고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단에 따르면 그것들은 너무 정상적이며, 이제는 우리의 ‘뉴노멀’이 되고 있는 중이다.
창조성을 신비화하고 신화화하는 추세가 주류인 지금, 저자의 이 책은 우리 사회와 우리 미래를 새롭게 전망하고 ‘창조성 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좋은 해독제가 되어줄 것이다.
『포스트 프라이버시 경제』에서 저자는 이제 우리는 신기술에 자신을 내보이기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데이터라는 자원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100년 전 소규모 지역 공동체를 지켜주던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은 이제 낡고 순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