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현실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풀꽃. 소시민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이광복 연작소설. 이 연작소설은 당초 치밀한 설계 위에서 출발했다. 작품을 한 편 한 편 발표할 때에는 꽃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빌려 각기 독립된 단편소설 형식을 취했지만, 이 단편들을 끈이나 꿰미로 꿰듯 한자리에 순서대로 가지런히 모으면 『만물박사』라는 큰 제목과 더불어 주인공의 고달픈 삶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연작소설이 되도록 구성했다.
이제 그 독립된 단편들이 한자리에 일렬로 줄을 서서 연작소설로 거듭나게 되었다. 모르긴 해도 동일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렇듯 30편의 연작소설로 구성해 낸 사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 연작소설의 주인공은 별로 잘나지 못한, 결코 못나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 신세를 한탄하며 허덕허덕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정다운 이웃이며, 어쩌면 또 삶이 너무 힘겨워 뼈마디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어째 좀 잘 안 풀리는(?) 현대판 봉이 김 선달
오한기식 생계백서, 첫 연작소설집 출간!
기존 소설의 관습과 문법을 흔들며 자전소설과 메타소설, 환상소설과 리얼리즘 소설이 뒤섞인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온 작가, 오한기의 첫 연작소설집 『무료 주차장 찾기』가 출간되었다. 데뷔 후 십여 년간 그는 『의인법』 『바게트 소년병』 등 두 권의 소설집과 『홍학이 된 사나이』 『가정법』 등 세 권의 장편, 『인간만세』 등 두 권의 중편을 발표해오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한국 문학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끈질긴 ‘소설가 소설’”(문학평론가 한영인)을 쓰는 작가 오한기는 “세상에서 가장 긴 한 편을 쓰는 매력적인 작가”(산문가 김신식), “일인칭으로 쓰였으되 삼인칭으로 읽힐 만큼 산뜻하여 늘 그의 자리가 커 보이는 작가”(소설가 전성태)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무료 주차장 찾기』는 ‘소설 이후의 소설’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꾸준히 모색해온 오한기의 연작소설집으로, 「무료 주차장 찾기」, 「숲 체험」, 「반품 알바」 등 세 편의 소설들을 담았다.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쓰는 화자’, 즉 소설가 ‘오한기’가 등장하는 연작들의 공통점은 ‘육아’와 ‘직업’이다. “비정규직 세입자” 신세인 ‘나’는 오전에는 알바를, 낮에는 주동을 돌보고 밤에는 글을 쓰며 “여기저기 영끌해서” 월 200만 원을 버는 처지로 온갖 부업들을 전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본업과 부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위계질서는 자본이라는 견고한 틀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데, “깔끔하게 구획된 하얀 선 내부의 보장된 공간”(「무료 주차장 찾기」)에 대한 갈망은 ‘무료 주차장’을 찾는 일련의 행위로 나타난다. 비용이나 권한, 위치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애쓰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리. 그것은 말 그대로 주차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전세사기의 염려가 없는 집이 될 수도 있고 밥벌이가 될 수도 있지만, 소설가인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설 쓰기’가 된다.
발문을 쓴 소설가 김화진은 “봉이 김 선달 식”으로 능청스럽게 들려주는 오한기 소설의 특징을 “고전미”에 있다고 꼽으며, 이번 소설들에서 본업인 소설가 외에 그의 직업이 한없이 늘어가는 것과 도마뱀 반품 알바가 도마뱀 보육 알바로 탈바꿈하는 ‘요술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고전미’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더군다나 풍자와 해학, 골계미야말로 오한기 소설의 매력인 과장과 허풍, 엄살과 비약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재치 넘치는 입담과 익살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 실소를 자아내는 허구의 이야기들 이면에는 냉정한 자기객관화와 현실직시가 뒷받침되고 있다. 신출귀몰한 N잡러 ‘나’의 변천이 버티고 견디는 날것 그대로의 생을 고증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소 어지럽게 보이더라도 결국엔 하나의 선을 그리게 될 거라는”(「반품 알바」) 그의 믿음대로, 이렇게 ‘오한기 월드’를 향한 선이 또 한 줄 그어졌다.
리얼하면서도 재치 있게 그려낸 한낮의 노동
장강명의 연작소설 『산 자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문예지에서 발표된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익숙하게 발생하는 일화를 발췌해 거대하고 흐릿한 적의 실체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10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소설들은 각각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총 3부로 나누어 수록되었다.
한국 사회의 억압 구조 안에서 가해자나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양상을 절묘하게 포착한 《공장 밖에서》, 어느 중견 기업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한 부서의 직원들을 구조 조정하는 이야기를 담은 《대기발령》, 목 좋은 어느 지하철역 근처에 차례로 들어선 빵집들의 무한경쟁기 《현수동 빵집 삼국지》 등의 소설을 통해 취업, 해고,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빚어내는 경제 구조를 동시에 보여 준다.
『천 개의 파랑』, 『이끼숲』, 『모우어』 천선란 신작 연작소설
2019년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한 이래, 천선란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폭넓은 독자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의 작품은 연극과 뮤지컬로 무대화되었고, 펭귄 랜덤하우스를 통해 영미권에 출간되었으며, 워너 브라더스 픽쳐스와의 영화화 계약까지 체결되었다.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천선란. 그의 두 번째 연작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가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천선란은 그간 장편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나인』,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노랜드』 『모우어』, 연작 『이끼숲』, 중편 『랑과 나의 사막』 등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상실과 생존, 구원과 돌봄의 윤리를 꾸준히 탐구해 왔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그 여정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무대 위에서 그 정서와 감각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이번 연작은 천선란이 데뷔 초 발표한 단편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2019)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2020)의 세계관을 확장해 집필한 중편 「우리를 아십니까」(2025,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수록)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를 아십니까」를 토대로 기존 두 단편을 각각 전면적으로 확장·개고해 중편으로 다시 썼고, 이로써 6년에 걸쳐 3부작 서사가 완성되었다. 천선란은 이번 연작에서 좀비를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고독을 비추는 거울로 삼으며, ‘너를 살리는 방식으로 내가 사는 윤리’(정우주, 「상실의 자리로부터-천선란론」)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세 편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좀비 아포칼립스를 마주한다. 1부는 감염과 붕괴의 초입에서 시작된 재앙이 이주 우주선으로 번지며, 무엇을 살리고 죽일지에 대한 선택의 순간을 그린다. 2부는 지구를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생존을 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부는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인간도 좀비도 아닌 존재들이 멸망 이후까지 사랑을 기억하고 지속하는 모습을 그린다. 세 편은 모두 ‘사랑하는 이를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과 ‘너를 살리는 방식으로 내가 살겠다는 마음’으로 단단히 이어진다.
배우 박정민이 추천사에서 “천선란 자네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해온 것이냐”고 물은 것처럼, 이번 연작은 사랑하는 이를 끝내 놓지 못하고,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죽음과 상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손끝에 남은 온기가 천선란의 세계를 이룬다. 또한 소설가 백온유가 “어째서 이토록 좀비는 지독하게 인간인가”라고 평한 것처럼, 이번 작품은 ‘좀비’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감정의 형태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삶과 죽음, 인간과 좀비, 폐허와 낙원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 천선란은 멸망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랑을 응시한다.
다시 한번, 황정은이 황정은을 넘어서다
나를 이루는 세계에 대한 황정은의 질문2019년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고 연작 『디디의 우산』으로 만해문학상 5ㆍ18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개성으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황정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 이 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