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연령장개석 연보관련사항188711월 31일, 浙江省 奉化縣 溪口鎭에서 出生18948淸日戰爭 발발손문, 흥중회 조직190014의화단 사건1906204월,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 淸華學校를 다니다 겨울에 귀국. 혁명지사 陳其美를 동경에서 만나 혁명 운동에 가담190822東京 振武學校에 입학. 同盟會에 가입190923아들 經國 출생191024손문과 邂逅. 진무학교 졸업.13연대 사관후보생이 됨일본, 대한제국 합병191125신해혁명으로 귀국. 杭州 무장봉기에서 決死隊長으로 처음 출전. 혁명 성공 . 上海로 돌아와 上海軍 제 5단 단장에 임명 됨.신해혁명191226동경에서 軍警雜誌 발간. 군사평론을 집필中華民國 成立191327원세개 타도 군사행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다시 일본으로 건너감.191428손문의 지시로 滿洲의 혁명 정세를 시찰.다시 일본으로 건너감제 1차 대전 발발191529다시 귀국하여 무력혁명 운동에 가담.일본 21개조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191731손문의 명령으로 동남 각 省의 黨務 ? 군사를 통할하다.러시아 혁명 발생191832?軍 제 2지대 司令에 취임191933가을, 월군 제 2지대 사령 사직5?4운동 발생192135陳炯明의 廣州反亂으로 위기에 빠진 손문을 구원.東路討賊軍 제 2군 참모장에 취임192337국민당 본부에 軍事委員會 設立, 그 위원에 피임.육군 본부 참모장에 취임.군사제도 시찰을 위해 소련 방문.192438黃?軍官學校 초대 교장에 취임.월군 총사령부 참모장 겸임.長州要塞 사령 겸임.국민당 一全大會 개최제 1차 국공합작 성립192539진형명의 반군세력 소탕을 위해 2회에 걸쳐 東征.黨軍을 국민혁명군 제1군으로 개편, 군장에 피임손문 사망192640중산함 사건 발생국민 혁명군 총사령에 취임전국 통일을 위해 北伐 시작192741상해에서 공산당 세력을 숙청총사령직을 물러나 일본 방문12월 송미령과 결혼국공 분열朱德일파가 남창에서 무장봉기장개석 연보192842국민혁명군 총사령에 복직. 제 2차 북벌 시작.제남사건. 북벌 완성. 국민당 主席에 취성공하였다. 1923년 소련을 방문하여 러시아 혁명 이후 반혁명진압을 지도한 트로츠키에게서 소련 적군의 조직원리를 배우고 赤軍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24년 6월 혁명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에서 적군의 조직원리를 배웠던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새로운 군인교육을 실해하여 자기에게 충성하는 혁명집단의 육성에 성공했다. 1925년 손문이 사망한 후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그는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수행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4.12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혁명인사를 잔혹하게 학살하고, 각지에서 당내의 반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1927년 4월 18일 무한정부와 대립하여 남경정부를 성립하였고, 같은 해 12월 1일 송미령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송자문 공상희와 인척관계를 맺고, 이들을 통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1928년 북경을 점령한 그는 남경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당과 정부의 통치권을 확립했으며, 풍옥상 ? 염석산 및 광동과 광서의 대소 군벌들을 몰아냈다. 193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포위전을 통해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이는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항일전쟁에 나서라’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1936년 독전을 위해 서안에 갔다가 장학량에게 감금당했다. [서안사변]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전을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된 그는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총사령에 올라 전면적인 항일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또다시 공산당과 결별하고 재차 내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초반우세를 지켰으나 이미 등을 돌린 인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패배한 그는 1949년 12월 대만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를 역임하여 자유중국 대만을 지배하였다. 1953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제연맹에 맡긴 이유는 한편으로는 홍군에 대한 내전정책에 전력을 투입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 영국 ? 미국간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에 압력을 가하고 최종적으로는 이와 타협하려고 한 속셈에 있었다.4) 서안사변장개석은 1935년 말 만주에서 철수한 동북군과 풍옥상계의 서북군에 명하여 홍군을 압박하고 있었지만 이미 대세는 항일 연합으로 돌아서 있었다.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국내 단결을 호소하며 시위하였고, 군인은 내전 중지와 대일 공동전선구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12월 서안에 도착하여 장학량에게 내전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 지도자들(심균유, 장내기 등을 비롯한 칠군자)을 체포했다. 그러나 내전보다 항일전을 갈망하고 있던 동북군의 장학량과 서북군의 양호성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공산당 소토의 중지와 일치항일을 강요했다. 이것은 兵諫이라 칭하고, 8항목의 요구를 전 중국에 선언했다. ) 공산당은 주은래를 서안으로 파견하여 장개석을 만나 항일을 한다면 그들과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편 국민당은 친일반공 노선의 何應欽과 장개석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인 송자문과 송미령 간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으나, 마침내 1937년 2월에 중앙위원 총회(3중전회)에서 中共문제를 토의, 중공을 비난하면서도 내전 정지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개석은 석방되었으나 희생은 컸다. 주역인 장학량은 모반의 장본인으로서 그대로 장개석에게 유폐되어 두 번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일이 없었다. 정치생명이 막히게 된 것이다. 또 양호성도 뒤에 체포? 감금되어 장개석이 대만으로 천도하기 직전 중경에서 살해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비극을 초래한 서안사변이었지만, 중국의 비극적인 내전을 보류하고 당면의 적인 일본에게 대항하는 제 2차 국공합작을 낳았다. 이로써 중국의 멸망을 구제하는 구국 ? 救亡운동으로서의 항일전쟁은 시작되었다.5) 제 2차 국공합작과 항일 전쟁서안사변이 해결된 뒤, 193이 일어남과 대조적으로 공산당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해방구의 농민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홍군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947년부터 수세에 있던 홍군이 역공세로 나서면서 임표의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산서와 산동, 그리고 하북 등 화중평원으로 밀고 나갔다. 1948년은 국?공내전에서 군사적 전환점을 이룬 해였다. 홍군은 동북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낙양과 개봉, 연안과 제남을 손에 넣었다. 1949년 4월에 남경이 함락되자 국민당은 중경과 성도로 수도를 옮겼으며, 끝내 그해 12월 대만으로 패주하였다. 국?공내전은 이렇듯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7) 대북천도1947년 말 동북 지방의 국민당 군대를 인민해방군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그들의 미국제 장비는 고스란히 해방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48년 1월 인민해방군은 북경과천진으로 입성했고, 4월 21일 장강도하작전에 성공했다. 며칠 뒤 남경과 상해가 함락되자 다급해진 장개석은 5월에 50만의 병력을 이끌고 대만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중국백서』의 결론대로 공산당은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은 민중의 정부이자 민중의 군대였던 반면에 국민당과 그 군대는 철저하게 민중과 유리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완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북경과 남경 등지의 박물관에 소장된 엄청난 국보급 보물과 은행에 있던 금괴를 잔뜩 지니고 그들은 대만으로 갔다. 대만은 이미 국민당 군대에 의해 사전 정리된 상태였다. 잠시 이양했던 국민당 정권을 되찾은 장개석은 패전의 근본적인 이유를 黨?軍?政 내부의 부정부패에서 찾았다. 그 후 대만 정치의 핵심은 바로 부정부패에 대한 단속이었다. 아울러 본토 수복이라는 대명제 아래 비상계엄을 유지하면서 국민당 독재를 강화시켰다.Ⅲ. 장개석의 사상1) 훈정지배중국동맹회 시대의 ‘3서’는 ‘군법의 치, 약법의 치, 헌법의 치’인 것을 에서는 “본당 진행의 질서는 세 시기로 나눈다”라고 하여, 그 삼단계를 군정- 훈정 - 헌정으로 개칭하고.장개석의 안내양외책은 이길 것 같지 않은 강대한 적은 만났을 때, 싸워서 패배하는 굴욕적인 성하의 맹(城下盟)은 피해야 하지만, 손해를 최소로 줄여야 한다는 딜레마 아래 편성된 전략이다. 이는 국가존망의 위기를 피해야 하는 때에 취해진 고뇌의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先安內’가 성공해야 했지만,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작전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실패의 최대 이유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장개석의 무력통일 노선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3) 공산당에 대한 생각장개석은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해 군벌과 제국주의를 상대로 싸워왔으나 앞으로의 진로는 공산당과의 합작으로는 중국통일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였다. 상해의 민족자본가(浙江財閥))와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많은 외국 자본가들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이유 중의 하나이다. 또한 국민당 혁명군의 중심적 장교에는 地主와 鄕紳출신이 많았고, 그들은 공산당이 주장하는 토지개혁이나 사유재산 철폐에 반대하였다. 장개석은 농촌의 지주층, 도시의 자본가, 군벌, 그리고 외국자본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산당과의 결별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4.12 사건의 사회 경제적 배경] 또한 장개석 자신도 淸朝末에 부유한 鹽商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산계급인 장개석 자신과 정치적 지지자들이 유산계급이었으므로 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Ⅳ. 宋家宋靄齡, 宋慶齡, 宋美齡 세 자매는 海南島 출신의 부호 찰리 송(Charlie Song: 본명은 宋嘉樹)의 자녀들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전도사를 하다가 귀국한 후 성경 출판과 방직 사업으로 큰 돈을 번 그는 손문의 친구이자 후원자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첫째딸 송애령은 공자의 75세손이자 대부호인 孔祥熙와 결혼하였고, 둘째 송경령은 孫文, 그리고 셋째 송미령은 蔣介石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송가수는 손문의 혁명을 추종하여 먼저 자기 가정의 모든 봉건주의 잔재를 없애고 세 딸을 민주, 평등, 선진적 생.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鄧小平Ⅰ. 들어가며Ⅱ. 등소평(鄧小平)의 생애Ⅲ. 三下三上의 시련과 재기Ⅳ. 개혁개방 정책의 형성Ⅴ. 등소평의 개혁개방 사상과 전략Ⅵ. 등소평체제의 중국식 사회주의Ⅶ. 제2차 천안문사태Ⅷ. 나가며Ⅰ. 들어가며등소평(鄧小平)이라는 이름과 가장 먼저 함께 떠오르는 것은 구부정한 어깨와 작달막한 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다. 그를 지칭하는 많은 표현이 있지만, 어떤 것보다도 현재의 중국을 있게 한 ‘개혁개방의 설계사’라는 표현이 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이 없었다면 떠오르는 강대국 중국의 현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본 발표에서는 등소평의 생애를 살펴보고,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의 형성 과정, 사상과 전략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현재의 중국 체제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살펴보는 데 있어 그 중점은 경제체제 개혁에 두었고, 군사체제 등의 기타 개혁들은 다루지 않았다.Ⅱ. 등소평(鄧小平)의 생애1. 등소평의 출생등소평은 1904년 8얼 22일 사천(四川)성 광안(廣安)현 패방(牌坊)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용하던 음력을 따르면 그의 생일은 7월 12일이 되고, 1904년은 용띠 해였다. 그의 아버지는 등소평에게 “선성(先聖)”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나중에 서당 선생의 추천에 따라 “희현(希賢)”으로 바꾸었다. 그는 “현왜(賢娃)”라는 별명 또는 아호를 사용했을 수도 있으며, 이 이름은 글자 그대로 “참한 소년”이라는 뜻이다.)등소평의 아버지는 이름이 ‘개화된 등씨’라는 뜻의 등문명(鄧文明)이었고 1886년 농사와 수공을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등문명은 중원(中原)에서 살다가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한족(漢族)을 가리키는 객가인(客家人)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청 제국이 강요해 온 변발 등의 요구를 피해 온 사람이었다. 등문명은 일찍부터 청조와 싸우는 전국적인 비밀결사인 가로회(哥老會))에 가입하 한다.새로 출범한 소련 정부는 1921년 6월에 ‘동방 노동자 공산주의 대학’ 또는 줄여서 ‘동방대학’을 모스크바에 창설했다.) 등소평과 청년동맹 동지들은 1926년 1월 파리를 떠나 이튿날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동방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등소평은 동방대학에서 몇 달 간 공부하다가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옮겼는데, 이는 전적으로 중국 학생들을 위해 1925년 9월에 설립된 학교였다. 정식 명칭이 손문(孫文) 중국 노동자 대학으로, 소련이 설치했지만 중국이 자금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조가 1901년 9월 7일의 의정서에서 11개 동맹국들에게 양보한 의화단사건 배상금에서 돈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4. 중국 귀국과 공산당 정치활동귀국하여 1927년 광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 반주류였던 모택동(毛澤東)을 지지하고,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남경(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中國)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한편 유소기(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모택동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1973년 3월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주원래가 죽자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모택동이 죽고 화국봉(華國鋒)이 주은래 계열의 노간부인 엽검영(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동흥(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국봉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왕동흥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등소평은 복직되었다.그택동은 1960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대약진정책의 포기, 경제조정정책으로의 이행을 결정하게 된다.대약진은 막대한 인적피해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난굴(亂堀), 난벌(亂伐)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자연파괴를 가져왔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로 인해 전국에서 2천만 명이 식량부족으로 숨졌다고 한다.3. 문화대혁명과 혼란의 10년1966~76년까지의 10년간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건국 이래 미증유의 대혼란을 겪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에 의한 건국 15년의 정치?경제?문화 사상 등 모든 경영의 총결산으로 발발한 것이며 모택동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건이다.)문화혁명이 시작되기에 앞서 중국은 소련과의 사이에 격심한 논쟁을 전개하여 소련이 ‘수정주의’로 타락했다고 해서 대결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또 한편 국내에서는 ‘조정정책’을 써서 경제파탄에서 벗어나려고 유소기를 중심으로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면서 동시에 수정주의의 영향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교육운동’과 ‘사청운동’까지도 전개하였다. 수정주의를 방지하고 중국이 자본주의로 변질하는 것을 막는 것, 이것이 문화혁명의 첫 번째 표면상의 이유였다.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최초로 100만인 집회가 열려 모택동이 처음으로 홍위병과 직접 접견하였으며, 이후 여덟 차례나 되는 천안문 접견을 통해 모택동은 대중에게 직접 실권파 타도를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홍위병운동이 문혁의 중심, 추진력이 된 것이다. 홍위병운동은 더없이 격렬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여유도 갖지 않은 채 해방감에 취해 거의 모든 지도자를 ‘실권파’라고 규탄하며 지도조직을 무시하고 파괴했다. ‘학술권위’나 ‘낡은 부르주아적인 것을 때려부숴야 할 것’이라고 지식인?학자?예술가들을 비판대회로 끌어내었고 문화재를 때려부수고 동네이름까지 혁명적으로 바꾸곤 했다. 그들은 각지의 홍위병과 교류한다고 열차에 올라타고서 전국을 설치고 돌아다니며 공장?학교나 역을 점거하였다. 1967년에 들어와서 문혁파의 후, 중앙군사위원, 정치국원, 부총리, 당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을 거치며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그러면서 농업과 공업, 군가 교육사업을 전면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생산력 발전에 기초한 자신의 정치노선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1975년 “농업을 기초로 농업에 복무하는 사상을 확립한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수출입을 확대한다. 기업의 과학연구사업을 강화한다. 기업의 관리질서를 정돈한다. 생산품의 질을 좋게 한다. 규칙제도를 회복하고 건전화한다. 노동에 따른 분배를 견지한다.”는 ‘7개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이후에 등장하는 개혁개방 사상의 초기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Ⅴ. 등소평의 개혁개방 사상과 전략1. 실사구시 사상노선등소평의 실사구시 사상에 관한 것은 양개범시(兩個凡是))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의 신시기 진입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상대로 해서 잘못된 것을 고쳐가는 과정이었다. 개혁개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론상 ‘좌(左)’의 착오를 바로 잡아야 했다.)1957년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좌’의 착오를 범하였다. 정치적인 ‘좌’가 1958년 경제적으로 ‘대약진’을 불러와 생산은 파멸에 이르렀고 인민생활은 곤란을 받게 되었다. 1959년, 1960년, 1961년 3년간은 정말 어려웠다. 인민이 배불리 먹지 못하였으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62년부터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여 원래 수준으로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을 시작하여 10년을 했는데 이것은 대재난이었다.역사적 경험, 종합, 착오 방지 각도에서 재강조(1987. 4. 30)1976년에 사인방 집단이 해체되고 문화대혁명은 끝났다. 하지만 좌의 사상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 지도급 가운데서 ‘양개범시’ 방침을 제안하여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모택동의 위망(威望)을 명예로 받들고자 했다. 이에 경제건설은 여전히 배회하는 상태에 있었고지역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선부지역이 약화되어서는 안 되고, 대과반이 장려되어서도 안 되고, 선부지역의 계속 발전이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얘기한다. 선부가 후부를 돕는 것은 행정수단으로만 해서는 안 되고, 시장경제 방식을 운용해서 실현해야 한다. 선부지역과 사람이 이익과 세금을 내는 방식으로 국가재정을 늘리고, 국가는 이 재력을 후부지역에 투입, 발전을 일으키거나, 선부지역과 사람이 직접 후부지역에 투자하고 후부지역은 자기 자원과 기타 우세한 점을 활용하여 합작하는 방법이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장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등소평은 설명한다.4.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유소작위(有所作爲)도광양회(韜光養晦)는 도광용회(韜光用晦), 도광은회(韜光隱晦)라고도 한다. ‘도광’은 명성과 재능을 감춘다는 뜻이고, ‘양회’는 은거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즉, 도광양회는 창끝을 거둬들이고 재능과 의도를 감추었다가 때를 기다려 일어난다는 뜻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자기발전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지금 우리가 대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방침은 온주진각)이다. 중국이 발전한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나서지 않고 조용히 실력을 배양하면 된다. 말은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하자. 우리 자신의 일을 잘 해내는 것이 곧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것이다.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에 전념하여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정국안정을 유지하면 그것이 바로 전체 아?태지역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유소작위(有所作爲)는 국제문제에서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을 말한다. 중국은 세계 최대 개발도상국으로서 세계평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국제문제에서 그만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이다.도광양회와 유소작위는 모두 중국 내 업무에 크게 떨쳐 일어나 일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앞장서지 않고 창끝을 들어내지 않으면서 할 일이 있으면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적극방어의 외교 전략이다.
신해혁명(辛亥革命)-미완의 혁명Ⅰ. 들어가며Ⅱ. 혁명의 전야(前夜)1. 손문과 흥중회(興中會)2. 유일학생(留日學生)의 활동3.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의 성립4. 무장봉기와 동맹회의 분열5. 청조의 대응6. 국내에서의 대중운동Ⅲ. 신해혁명의 전개1. 무창봉기(武昌蜂起)와 남북의화(南北義和)2. 남경임시정부(南京臨時政府)와 원세개정권의 성립Ⅳ. 신해혁명의 결과1. 혁명에서의 농민의 역할2. 혁명에서의 반청과 반제3. 공화제의 의의Ⅵ. 결론들어가며1880년 유럽 열강은 제국주의 세계정책을 채택하여 복잡한 이해대립 아래 동맹과 협상을 맺고 세계분할, 자본수출에 나섰다. 열강의 주요 관심은 동남아시아에 집중하여 갔다. 이런 가운데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청?일 양국이 대립하여 싸웠고, 청국이 패배한 이 전쟁에는 열강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3국 간섭 이 이루어졌다. 청조는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하고, 군사?경제상의 요지를 열강에게 조차지(租借地)로 제공하였으며, 세력범위의 형성을 인정하고, 철도부설?광산개발 권리를 넘겨주어 중화제국은 그 본체라 할 영역까지도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에 대하여 중국의 지식층은 청의 존망이 문제가 아니라 중화의 멸망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느끼게 되면서 중국의 장래에 대한 망국은 물론 과분(瓜分)의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청의 대응은 새로운 개혁을 통한 부강을 꾀하려는 변법자강운동과 배외운동(排外運動)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무술개혁, 그리고 후자는 의화단운동으로 진행되어 나갔다.하지만 급진적인 무술개혁과 수구파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하게 된다. 또 의화단 사건은 열강들의 무력에 북경은 함락으로 실패하였고, 이에 청조는 1901년 9월 7일 청과 서양의 11개국의 대표는 북경에서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거액의 배상금을 열강에게 지불해야 했고, 관세와 염세(鹽稅)를 열강에게 저당 잡히는 등 열강들의 반(半)식민지화 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열강들의 중국 과분정책에 의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거아운동의 실패와 청조의 탄압은 유학생들에게 혁명으로의 욕망을 부추겼고 또 빠르게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전 반제로의 투쟁을 反滿?反淸으로 혁명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3.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의 성립거아운동 이후 반만사상이 혁명의 중심 과제가 되었다. 비록 전국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화흥회나 광복회와 같은 지방적 혁명조직이 성립되었다.화흥회는 1903년 11월 황흥, 송교인(宋敎仁), 유규일(劉揆一) 등 유일학생이 중심이 되어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에서 설립한 혁명조직이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한다 는 구호를 내세웠다. 비밀결사와 연락하여 장사에서 봉기하려다 발각되어 중심인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광복회는 1904년 겨울 상해에서 설립된 조직으로서 복고회(復古會)라고도 하였다. 채원배(蔡元培)를 중심으로 장병린(章炳麟), 도성장(陶成章) 등을 중심으로 광복한족(光復漢族), 환아산하(還我山河) 를 구호로 하여 주로 강소, 절강지방에서 지식인과 회당을 연락하여 반만혁명을 추진하였다. 또한 호북성에서는 여대삼(呂大森), 조아백(曹亞伯) 등이 중심이 되어 1904년 7월 무창에서 조직한 과학보습소(科學補習所)가 있다. 군대나 학생세력의 결집을 꾀한 최초의 혁명조직으로 알려져 있다.)이처럼 전국적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확산되자 지역적 색채가 강한 많은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혁명조직과 봉기계획의 준비가 시도됨에 따라 전국적 차원의 조직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일본의 동경에서 전국적인 차원의 혁명조직인 중국동맹회가 1905년 8월 설립됨에 따라 해결된다.당시 혁명단체들은 분산된 힘을 연합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각기의 혁명단체들은 자기 출신 성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국성의 혁명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혁명파들이 조속히 해결하여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는 광동의 흥중회, 호남의 화흥회, 절강의 광복회를 중심으로 한 중따라 여러 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10여 차례의 무장봉기의 실패로 재정난의 악화와 지도력의 부재는 동맹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킨 원인이 되었다.그리하여 1907년 8월 동경에선 장강 유역 출신으로 회당공작에 주된 관심을 가진 장백상(張百祥, 사천), 등문휘(鄧文輝, 강서) 초달봉(焦達峰, 호남), 손무(孫武), 유공(劉公) 등이 공진회(共進會)를 설립하고 뒤이어 장강유역을 중심으로 회원을 파견하여 혁명공작을 전개하게 되었다.) 명목상 동맹회의 외곽 조직을 자처했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혁명단체였다.)또한 광복회도 동맹회의 성립 후 절강, 강소, 안휘를 주무대로 하여, 마침내 1910년 2월에 동경에서 광복회본부가 재건되어 동남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광복회의 재건은 동맹회의 손문 일파와의 사상적, 지역적 기반과 전략의 차이, 개인적 반목 등이 원인이었지만 이러한 대립은 후에 혁명파 내부의 분열과 약화라는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1910년 중반에는 손문 일파의 변경혁명(邊境革命) 에 대한 불만으로 장강혁명(長江革命) 을 주창한 송교인, 담인봉(譚人鳳), 거정(居正) 등이 1911년 7월 31일 상해에서 동맹회중부총회(同盟會中部總會)를 설립하였다. 중부총회는 손문의 사상, 노선에 대한 비판과 동맹회를 재건하려는 의도에서 건립된 것으로, 이후 장강혁명을 적극 추진하고, 무창봉기 이전 호북의 공진회와 문학사(文學社)의 연합을 추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이와 같은 동맹회 내부의 분열은 무창봉기 이후 혁명의 진행과정 속에서 혁명파의 단합과 통일적인 행동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으며, 그 결과 혁명파가 권력을 장악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을 가로막는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 실제적인 혁명의 전개 직전에 혁명파는 그것을 지도할 만한 통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5. 청조의 대응의화단운동 이후에 청조는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청조는 1901년 1월 29일 이른바 변법(變法)의 으킬만한 분위가 성숙해 가자 월 14일에 두 단체는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임지 지휘부를 설립하고 중부총회와 연락하여 각성에서 호응을 책동하는 동시에 황흥과도 연락을 취해 그 지휘를 요청하는 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최초 거사 예정일은 10월 6일이었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거사 일을 1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10월 9일 한구 러시아 조계에서의 예상치 못한 폭발사건과 그로 인한 청조의 탄압으로 봉기의 지휘간부가 도피하였고, 지휘부가 마비된 상태에서 무창봉기는 계속적인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감행될 수밖에 없었다.비록 지도부가 와해된 채 봉기를 시작하였지만 봉기는 성공하여 11일 호북자의국에서 도독(都督)의 선출과 군정부의 수립을 위한 회의를 가지고 여기에서 입헌파 인사의 제의에 따라 신군협통(新軍協統) 여원홍(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革命軍政府)를 건립했다. 물론 혁명군 측도 자체의 권력기구로서 긴급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략처(謀略處)를 설치함으로써 군정사무를 장악하였다. 군정부의 성립 후 즉시 국호를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 개칭하고 동시에 전국에 봉기의 정당성과 이에 대한 호응을 요청하는 통전(通電)을 하였으며 나아가 대내적으로는 가연 잡세의 폐지, 군인, 관료봉급의 평균화, 기타 금융, 재정의 안정책 등을 발표하고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기존의 이권, 권리를 모두 인정하고 외국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되 청조를 원조하는 경우에는 적시(敵視)하겠다는 입장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무창봉기의 성공에 의해 전국은 곧바로 급격한 혁명의 회오리 속에 말려들게 되었다. 무창봉기 후 1개월 사이에 섬서(陝西), 산서(山西)의 북방 2성과 호남, 운남, 강남, 귀주, 강소, 절강, 광서, 복건, 안휘, 광동 등 대부분의 남방각성, 그리고 상해가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여 혁명군 측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각 성에서 독자적인 형태로 독립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그 양상에 있어서도 다양한 결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의 존속기간이 짧았을 뿐 아니라 명목상의 중앙정부일 뿐 효과적인 지방통제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재정부족으로 일본과 교섭하여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의 중일 합작을 조건으로 거액의 차관을 얻으려 시도하나 격렬한 반대를 받아 결국 실패하였고 부족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계층에게 기부를 강요하거나 폐지된 상인층, 농민층의 가연잡세를 부활시키는 등 혁명에 의한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의 반발을 받아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혁명군 내부에서도 통일적인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고 분화현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임시정부 수립 후 남북의화는 북방 대표로 원세개가 직접 담판을 나섰고, 논의대상도 공화제를 전제로 청제의 퇴위조건을 둘러싼 것으로 점차 변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 손문은 혁명의 성과를 퇴대한 확보하고 비록 원세개에게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탄 열강의 변경지역침략의 노골화와 그로 인한 과분(瓜分)위기의식의 강화는 신속한 타협의 달성과 그것에 의한 국내의 통일 및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여론을 부추겼고 이러한 것은 혁명군 측의 노력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열강이 원세개를 지지하고 남경임시정부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몰아넣고 있었던 것은 혁명군 측의 입지를 더욱 제한시켰다. 이에 손문은 1월 22일 타협책을 제시하였고, 1912년 2월 12일 퇴위 후의 청제(淸帝)에 대한 우대조건의 타결이 이루어져서 청제의 퇴위조(退位詔)가 발표되었다. 이것에 의해 16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청조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동시에 2천년 이상 되었던 황제전제지배체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월 13일 손문은 남경참의원에 사직원을 제출하였고 14일 참의원은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원세개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북경정도(北京定都), 남경정도(南京定都)의 문제였다. 허나 손문것이다.
명 청대 자본주의맹아와 관련하여. 서론중국의 봉건사회는 상품경제를 발달시켰고 자체 내에 자본주의의 맹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외국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서서히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해갔을 것이다. 1939년 毛澤東의 발언으로 촉발된 資本主義萌芽論 은 1954년『紅樓夢』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싸고 학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논의는 명말 청초의 매뉴팩쳐(manufacture)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여, 일찍이 고도의 문명을 발달시키고 세계문명에 많은 공헌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를 태동하지 못했다고 하는 중국사회의 절대적 정체론에 대한 반론의 제시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서구 역사가들이 자본주의의 맹아에 대한 공산주의 역사가들의 연구를 단순한 정치적 주장에 대한 증거 모색으로 치부하기는 하지만,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중국은 놀라울 만큼의 경제적 활력과 사회적 변화를 보였다. 이에 발맞춰 그 동안 명,청대사회경제사연구는 전근대사회에 내재하는 발전성의 해명을 목적으로 상품생산과 지주제, 수리개발을 통한 생산력 발달에 따른 소농민 자립화와 농민운동, 농촌경제의 상품화에 의한 농민층 분해 및 그에 따른 자본 임노동의 새로운 생산관계 형성, 농촌 직물 수공업과 도시 금융 상공업에 대한 연구를 거쳐 명말청초의 사회변동기의 주역인 紳士층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중국사회의 정체성의 비판을 목표로 전개한 이러한 연구들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는 중국사회와 서구사회를 대치적인 것으로 보고 서구적 가치를 기준으로 양자를 비교하여 서로의 부등 우열을 논하는 연구였기에 서구 편향적인 연구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시켜 명백한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전세계적으로 또한 통시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굳이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해야 할 당위성도 없었고, 중국 사회 구조적으로 봤을 때에도 자본주의가 태동할 필요성도 없었다. 그러므로 본 주제순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자유주의의 원칙을 대신하는 계획경제 또는 통제경제가 주장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케인스 경제학인데, 여러 면에서 자본주의의 성질이 변화되어 오늘날은 수정자본주의로 일컬어진다.이 중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본주의의 형태는 상업자본주의 와 산업자본주의 인데, 이는 상인이 상품의 생산과정에 개입하여 대규모의 공장제 공업을 운영하면서 시장의 수요에 따라 기술을 개량하거나 생산단위를 확대하거나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다고 경제사가들이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출현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출현시킬 뜻도 없었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에도 중국 본위의 태도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康有爲와 梁啓超의 무술변법 이후 급격히 변하게 된다.2. 명 청대 경제개발과 상품생산(1)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생산의 증가중국의 인구는 후한부터 당대까지 약 7, 8세기 동안 6,000만 명에서 8,000만 명에 달한 적도 있으나 결코 이를 넘지는 않았다. 송나라 11세기에는 약 1억 800만 명까지 늘어났으나 몽고의 정복과 지배 아래에서 다시 줄어들었다. 그 후 중국은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게 되는데, 명초에 6,500만 명에서 8,00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850년에는 4억 3,00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450년 동안 약 여섯 배나 늘어난 수치였다. 이 사이에도 인구 변동상의 굴곡은 있었는데, 이 기간 중 가장 큰 인구의 감소는 17세기 초기와 중기에 나타났다. 이 시기는 명 청 교체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농민반란, 정복전쟁 그리고 1630년대 말부터 1640년대 초까지 화북지방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어 1680년대 만주인의 지배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인구는 다시 증가하여 예전에 없던 수준에 다다랐다. 이런 증가는 주로 18세기 동안에 발생한 것으로, 1700년에 약 1억 5,000만 명이었던 것이 18세기 말에작이 행해졌다.{) Lloyd E. Eastman 著, 이승휘 譯『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돌베개, 1999, p. 24중국의 농경은 노동집약적이었다. 풍력과 수력을 이용한 기계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가축은 운반용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가축을 구입해서 사육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농가의 3분의 1은 운반용 가축을 살 여유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력은 풍부하고 값이 쌌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소나 물소 없이 남녀, 특히 남자가 쟁기를 끌고 짐을 날랐다.(2) 강남 면 견직물업의 전개명말 청초에 강남의 직물 수공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강남의 농민이 면직업에 참여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농가경영의 위기상황에서 상품생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생산한 면화는 일단 상인에게 팔고, 다음 단계의 가공을 하기 위해서는 상인으로부터 그 원료를 다시 구입하는 先貸생산이 이루어졌다. 布號(면포자본가)가 염색업자 혹은 단포업자를 거느리거나 暑 (여름버선)을 만들게 하는 것이 그 예였다.{) 오금성,「청초 상품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 맹아 론」,『명말청초사회의 조명』,한울아카데미, 1994, p. 156거대한 자본가인 客商은 생산현장 밖에서 유통기구(매매의 가격차)를 통해서 영리를 추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牙行이라는 면포상인이 개입하여 이윤을 착취하였으므로 영세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이윤을 축적하고 경제적인 성장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려웠다.강남 지방의 견직물업은 중국역사학계에서 명 청 자본주의맹아 토론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분야이다. 견직업은 중국 고대로부터 발달되어 온 수공업인데, 명조는 초기부터 생사를 조세와 공납체계에 포함시켰다. 북경과 남경 그리고 전국 24개 주요 도시에 내 외직염국을 설치하여 匠役制에 따라 匠戶(匠籍에 등록된 민간수공업자)를 동원하고 官이 감독하는 관영생산체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영공장체제는 관리의 노동착취, 불안정한 급여, 중간 착복 등이 심하였다. 그 때문에 15세기 중는 바로 鄭和가 당시 세계 최대의 선단을 이끌고 남해원정에 나서던 무렵인데, 이런 해외원정이 그 후 계속되지 않은 까닭은 거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그럴 필요가 중국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페어뱅크는 설명한다. 중국이 유럽보다 도시화와 상업화 면에서 뒤지지 않았음에도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은 까닭은 상인이 국가권력을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중국의 국가가 이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자신의 상품과 경쟁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 세계의 은화가 자국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다가 국가 세수를 뒷받침한 농업의 기반이 광대하여 국가가 상업을 지원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유용태,「다원적 세계사와 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역사교육 63호』, 2003, 겨울, p. 18더욱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곧 정부의 간섭이 시작되었고, 규모가 크고 이윤이 나는 기업은 정부의 통제, 과세,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관료는 모든 수단을 써서 상인계급을 억눌렀다. 만약 기업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면 정부는 손을 뻗어 통제 하에 두고 이익을 가로챘다.또한 정부는 교역의 기반 정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명·청조는 도량형제도의 통일, 전국적인 금융제도의 개발, 심지어 필요한 도로나 교량의 유지조차도 게을리 했다. 상법이나 법인에 관한 법률체계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재산권은 보호받지 못했고 계약의 충실한 이행도 보증 받지 못했다. 특히 직접적인 행정지배라는 사고방식 대신에 행정에 있어 중개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채용했다. 이는 송대 이후로 진행된 상업상의 발달, 동시기의 인구 증가에 따라 행정업무의 양이 행정능력을 넘어선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경제정책의 채택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등장한 정부의 기능을 축소한다고 하는 사고방식, 지방단위의 지도를 지역 엘리트가 맡아야 한다고 하는 추론은 송대에 성립한 주자학에 의해 이데올로기로서 인가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중개 역할을 독점적 청부업으로 간주한 중개인은 일반듯이 상인들의 합리적인 경제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일 뿐 그들에게 더 진보된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3. 명 청대 사회 변화15~16세기 이래 상품 생산의 전개에 따라 명 청대의 사회는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때 각 도시에 거주하는 수공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官에 대한 반항이 빈발하게 되는데, 이를 民變이라 한다. 이러한 민변은 환관들의 횡포로 인한 과중한 세금으로 물가가 폭등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상업이 마비되고 폐업이 속출하여 수많은 傭工들이 실업자로 전락하게 됨에 따라 무장 폭동의 형태로 발생하였다. 민변은 역대의 왕조 말기에 의례 있어 왔던 민중봉기와 구별되는 세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는데 첫째, 용공들이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과 뚜렷한 목표 하에 행동하였다는 점, 즉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연대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둘째 일반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 셋째 그 지역이나 부근의 관료 지식인층마저 그들의 행동에 직 간접으로 지원하거나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바꾸어 말하면, 강남에서의 명 중기 이후의 상품생산의 발달로 인하여, 명 말에 이르면 강남의 도시나 농촌을 불문하고 지식인과 서민 모두가 유사한 사회 인식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오금성,「명말 청초의 사회변화」,『강좌중국사Ⅳ』,지식산업사, 1989, p. 122즉 민변은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상품생산의 발전에 수반해서 형성된 도시민의 공통의식에 바탕을 둔 일종의 사회모순 해결운동 이라고 할 수 있다.민변과 함께 抗租와 奴變도 명 청대에 일어난 민중운동으로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민변이 도시민 수공업자의 반항운동이었던 것에 비하여 농촌에서는 하층 영세농민의 반항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였다. 16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까지 일어난 항조운동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1 수확의 풍흉에 좌우되는 자연발생적 우발적 기아적인 항조가 아니고 常在的 항조, 2 어느 정도의 전호경영의 자립화를 전제로 한 조직적인 항조, 3 개별적인 항
러시아 혁명의 원인{1. 게오르기 스미르노프2. E.H.Carr3. 猪木正道4. 테어도어 폰 라우에5. S. Monas6. L. H. Haimeon7. K. V. Beyme러시아 혁명의 원인에 대한 해석사1. 게오르기 스미르노프{) 구소련 과학아카데미 준회원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1987년 3월 13일 구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 에 「혁신의 혁명적 본질」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레닌은 중앙집권과 지방의 創意와의 올바른 상화관계를 설정하도록 끊임없이 배려했었다. 하지만 이 레닌적 배려는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우리는 창의성 있는 경제활동으로부터 몇 십만의 노동집단과 몇 백만의 전문가·노동자들을 몰아내고 기업에 부여했던 경제계산제의 권한을 빼앗아버림으로써 많은 것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은 과학기술의 성과를 생산에 이용하는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 E.H.Carr러시아 혁명은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최고 절정에 달했던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최초의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제1차 대전이 한창인 때에 일어났고, 부분적으로는 그 전쟁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몰락의 결과로서 동시에 그 원인으로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러시아 혁명이 세계적 의미를 갖는 반면, 또한 그것은 여러 가지 러시아적 특수 상황에 그 근원을 가진 것이었다. 화려한 겉보기와는 달리 짜르전제는 그 안에 농비해방 후에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발전을 보이지 않는 정체된 농촌경제와 기아와 저항적 농민을 간직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 집단은 1860년대 이래 폭동과 진압을 반복하면서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로드니크 운동이 일어나 나중에 사회혁명당이 되는데 그들의 호소는 농민을 향해서였다. 1890년 이후가 되자 공업화는 원시적인 러시아 경제에 중대한 침투를 개시했다. 그리고 점차 유력하고 부유하게 된 공업가나 금융계급-외국 자본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었지만-의 대두는 일종의 리버럴한 서구사상의 침투를 촉진했으며, 그것은 입헌민주당에서 최대의 표현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과정과 함께 공장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의 성장도 나타나 그들의 불온한 움직임의 초기 징후가 나타났다.3. 猪木正道러시아혁명사의 서술은 러시아의 후진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러시아혁명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실로 러시아의 후진성이며, 러시아혁명을 세계최초의 사회주의혁명으로 진전시킨 것도 바로 그것이다. 농노제는 1861년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엄존했으며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농민, 즉 농노는 거의 문맹이었다. 군벌, 관료, 경찰의 전제정치는 국민생활을 꼼짝도 할 수 없게 속박하고, 유치장과 교도소에서는 태형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1980년대부터 불·러동맹에 따른 군사상의 필요에 자극받아 전략적 철도의 부설과 군수공업의 건설이 강행되어 주로 프랑스자본의 도입을 통해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아직 산업혁명을 완료하지 못했다.猪木正道는 러시아의 후진성에 관해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첫째, 짜르즘에 관한 문제로 서유럽의 제 3계급과 같은 계층이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표트르대제는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치지 않은 러시아제국을 강권을 사용하여 위에서부터 서유럽의 수준에까지 끌어 올리려고 했다. 표트르대제의 계몽적 역할은 서유럽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러시아의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서유럽의 압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점에 있었다. 이리하여 국가는 소수의 대지주귀족과 결탁, 국민의 부와 소득의 대부분을 수탈하게 된다. 대지주 귀족과 농노라는 단순한 사회구성 속에서 서유럽의 제3계급에 해당하는 계층은 성장할 수가 없었다.둘째, 위로부터의 개혁에 절망하고 짜르즘에 대한 맹목적인 굴종으로부터 자각하게 한 나로드니크를 들고 있다.{) E.H. Carr 는 러시아 혁명의 원인에서 나로드니크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猪木正道는 나로드니크를 러시아의 후진성 사례로 삼으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나로드니크의 사회주의는 국수러시아적인 것이며, 서유럽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그 유래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혁명사상에 기초하여 러시아의 서유럽화와 자본주의화를 극도로 혐오하고 배격했다. 서유럽에 대한 맹렬한 반감과, 러시아의 국수주의적 전통에 대한 광신적 신앙이라는 점에 있어서 나로드니크는 분명히 러시아의 사상계를 서구주의와 이분해 온 슬라브국수주의의 일파였다.셋째,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 1890년대 초 제정러시아가 프랑스와 공수동맹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자본이 도입되어 자본주의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현저한 자본주의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후진성은 조금도 수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차 내부로 퍼져 첨예화하여 갔다.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이 19세기말 이래 다소간 사회정책의 혜택을 받아 초기의 혁명성을 상실하고 의회를 통해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하고 있었음에 반해,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그 자본주의의 후진성과 부르주아의 무력함으로 인해 원시적 혁명성을 간직하고 있었다.4. 테어도어 폰 라우에그는 러시아혁명을 외부로부터 초래된 혁명으로 파악하였다. 후진국을 가능한 한 짧은 기간 내에 발전시켜야 된다는 필연적 요구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가 일군의 열강들 사이에서 제국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서방의 선진공업국들을 따라잡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는 것이다. 폰 라우에에 따르면 재무대신 위테가 산업건설을 강행하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 이 근대화문제는 명백히 최우선적 중요성을 차지하였으며 제정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폰 라우에의 해석에서는 산업화가 연속성 문제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5. S. Monas크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만은 어쨌든 1789년 이후 서방세계를 점점 더 새로운 폭발 속에서 해체시키고 있던 동요들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r 여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가능성이 니콜라이 황제의 후임자들 치세에 들어오면서는 지극히 불확실하고도 의심스럽게 되어버렸다. 제정 러시아는 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으로서, 격렬한 해체와 계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을 막아내는 요새로서 굳건히 버틴다고 하는 자신의 기능을 돌이킬 수 없이 상실해버렸다. 심지어는 전제정이 사물의 진정한 질서라고 하는 명제를 굳이 부인하려 들지는 않던 사람들조차, 그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혁명은 이제는 더 이상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처럼 러시아국경 너머에 존재하면서 방향 잘못든 니 니 하는 무리들의 책동에 의해 어쩌다 한번 썩은 이 국경을 넘어서 밀려들어오기도 하는 그런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6. L. H. Haim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