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1987년 노동법 개정 이후 민간과 공기업 분야에서의 노조 구성과 활동 권한이 대폭 신장되었지만, 공무원의 경우에는 일부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단결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단체행동권을 제외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전국공무원노조’가 양대 노총과 공동으로 대응하며 완전한 노동3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등 여전히 공무원 노조 문제에 대한 큰 이견을 보여 왔다.외부적으로는 1991년 국제노동기구(ILO)의 가입에 따른 국제협약 준수와 WTO 출범에 따라 노동조건을 무역규제와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고, 1996년 OECD에 가입됨에 따라 공무원을 포함한 노동조건의 선진화에 대한 압력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Ⅱ. 본론Α. 공무원 신분에 대한 고찰공무원 노조의 언급에 앞서 공무원이라는 특수적인 신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공무원은 두 종류의 신분을 지닌다. 하나는 정부에 고용된 고용인의 신분이고, 또 하나는 일반 국민의 신분이다.일반적으로 공무원의 신분을 공직에서 근무하는 것을 특혜로 보는, 국가와 공무원의 고용관계를 특별권력관계로 이해한다. 따라서 공무원의 신분 자체가 하나의 특혜이고 또한 자율적으로 정부에서 일할 것을 선택한 상황이기 때문에 공무원에게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상당부분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공무원의 기본권 제한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표현의 자유, 사생활 자유권, 마지막으로 노동3권을 들 수 있다.Β. 공무원 노조와 기업 노조의 차이점ⅰ. 정치적 중립성우리나라는 원칙적으로 공무원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고 있다. 헌법 제7조 제2항에 따르면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조항에 따라 국가공무원법 제65조에 정치적 중립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공무원에게는 ‘정당 기타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가입을 금지’하고, ‘선거에서 특정 정당(인)의 지지?반대를 금지’하며, ‘다른 공무원에게 이러한 금지조항을 요구하거나 정치적 행위결과에 이익?불이익의 약속을 하지 못하도록’하고 있다. 과거 집권여당이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탈법적으로 공무원을 정치적 활동에 참가시켜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치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점차적으로 공무원의 정치선거 개입은 줄어들고 있다.이에 비해 일반 기업의 노조는 정치적 선택에서 자유롭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각종 정치적 이슈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사회적 정책과정에서도 각각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주노총의 경우 한발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이라는 노동자 정당을 설립함으로써 노조의 정치적 참여뿐만 아니라 행정, 입법 등 국가운영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ⅱ. 노동3권의 보장먼저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의 노동조합에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 노동3권은 노동자의 노조활동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3가지의 권리이다. 이는 기업의 노조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현재 국가공무원법은 사실상 현업의 노무종사자에 한하여만 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을 부여하고 있다. 관리직 공무원의 경우에는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이 제한된다. 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을 허용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가하다. 많은 나라에서 이를 금기시하는 이유는 ‘공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주요 선진국의 공무원 노동권 허용기준≫국 가분 류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영 국경찰단일 단체에만 가입가능허용형사처벌의 대상독 일일반공무원허용허용징계대상노무자허용허용허용직원허용허용허용관리허용협의권만 인정불허경찰허용협의권만 입정불허미 국주.지방 공무원각주 지방정부마다 다양한 규정 존재단결권과 동일동일프랑스경찰 형무소 직원허용허용불허일 본경찰불허불허불허일반공무원허용협의권만 인정불허현업기관허용허용불허노동조합에게 교섭의 자율성을 실질적으로 확보해 주기 위해서는 단체행동권의 허용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공무원의 경우 노동조합 결성과 교섭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단체행동이 엄격히 통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민간부분과는 달리 노조의 파업을 인정할 때 이에 대응하여 행정서비스의 중단을 의미하는 직장폐쇄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형평성의 차원에서 공무원 노조의 단체행동을 제한하는 것을 타당하게 보고 있다.≪민간분야와 정부의 노동조합활동상의 차이점≫구 분민간분야정부단체교섭상의 근로자 영향력파업의 경우에도 경쟁사의 계속적인 서비스가 가낭하기 때문에 교섭력이 미약하다.파업 중 서비스 중단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강력한 교섭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단체행동권이 대부분 주어지지 않는다.단체교섭 권한교섭대표가 재량권을 발휘하여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합의도출 권한이 제한되어 있다. 합의하더라도 의회 내지 상급기관의 승인이 요구된다.(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재정경제원의 예산편성이 우선적으로 적용될 것이다.제3자의 관심대체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능하기 때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교섭결과에 따라 당장 서비스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민이나 언론의 관심이 매우 높다. 교섭대표는 많은 외부압력을 받게된다.교섭의 범위매우 광범위하다.보수 등 교섭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많다.단체행동권다양한 단체행동(파업)이 허용단체행동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단체협약협약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고 장기간 계속된다.법규정에 우선할 수 없다.유효기간이 짧다.Ⅲ. 결론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불합리한 인사행정, 공무원들의 사회적?경제적 만족감의 결여, 권위주의적 행정문화로 인한 상하간의 의사전달부재 및 합리적인 정책결정의 결여, 전통적 인습인 보수부족분의 현지조달식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 등은 행정의 선진화를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들이다.이러한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공무원단체제도이다. 공무원단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공무원들에게 근무조건의 개선과 귀속감으로 사기를 높여주고 직업윤리를 강화시켜 부정부패의 감소에 이바지하며, 상하간의 의사전달을 통한 합리적인 정책결정과 집행, 직업공무원제의 정착 등에 기여하므로 효과적인 제도이다.공무원노동조합은 민간기업과는 구별되는 공무원노동조합운동의 특성을 반영하는 노동운동노선을 추구하여야 한다. 공무원노조운동의 기반인 공공부문은 무엇보다도 공공서비스의 제공으로 특징 지워지며, 이러한 특징은 공공서비스 노동운동주의의 주요한 원천이 된다. 즉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의 의의는 '공공성'에 대한 전사회적 수준에서의 합의를 자신의 동력으로 할 때만 확고해짐을 의미한다.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공무원노동조합운동은 기득권의 수호자가 아니라 '정의의 칼(sword of justice)'이라는 노동조합 고유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렇듯 공무원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이거니와 이슈의 확대를 통해 사회적 이해관계의 대표자로서 사회복지의 향상과 사회적 통합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공무원노조가 단순히 임금 등 경제투쟁에 매몰될 경우 국민적 설득력과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힘들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근로조건 개선 요구가 아닌 공무원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익을 수호하는 정책개발을 통해 공직사회를 장악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선진 각국의 공무원노조 활동 사례를 보면, 일본공무원노동조합은 주도적으로 소수자들의 인권보장, 행정개혁운동을 추구하여 일본 사회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스웨덴 공공부문 노조의 경우 전체 사회의 복지 확대를 위한 첨병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보수당 집권 시절 대폭적인 복지축소를 막은 가장 강력한 집단은 다름 아닌 공무원노동조합이었다. 이렇듯 공무원노동조합은 시민사회의 요구와 필요를 공무원노동조합이 대변하는 방식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로 자리 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명 성 황 후 시 해 사 건? 명성황후는 누구인가?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 국장이 거행되었다. 능은 양주의 홍릉이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명성황후 시해 이전의 조선과 주변 정세명성황후 시해 이전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청일전쟁의 승리에 따라 체결된 하관조약에 의해 조선에 대한 단독지배권을 확보하고 요동반도를 차지한 일본과, 일본의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는 범 서방세력, 특히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895년,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은 공동합의를 거친 각서를 제시한다. 이는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는 청국의 수도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여 장래 극동의 영구적 평화에 장애를 줄 것이므로 요동반도의 영유를 방기할 것을 권고한다.”는 것으로 청일전쟁의 강화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불과 일주일 만에 행해진 삼국간섭이다. 삼국간섭은 청일전쟁 이후 만주와 한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단독지배권 확보와 요동반도 점령에 따른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를 노린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요동반도의 점령을 명문화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게 한 것은 어디까지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서구 열강의 조선 문제에 대한 공식적 이의제기를 피하고자 취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고 요동의 점령은 조선의 영토 또한 일본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삼국간섭이후 비준서 교환날짜까지 남은 기간을 이용하여 영국, 미국, 이탈리아에 접근하였지만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확인하고 삼국의 권고를 수용한다. 하지만 일본은 삼국의 요구에 따라 요동반도를 반환한다는 것이었을 뿐 청국에 대하서는 전승국의 입장으로부터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일본의 자세는 조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왕비의 ‘인아거일(引俄拒日)’과 그 내막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삼국간섭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독무대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전년도 경복궁을 습격하여 한국정부를 전복시킨 일본은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내각인사를 수시로 교체하였고, 1894년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는 차관협정을 통해 한국의 철도?전신?우편 등 각종 이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해갔고, 하관조약 체결 이전인 1895년에는 주미한국공사관의 폐쇄와 일본공사관으로의 업무이전을 추진하는 등 외교권까지 박탈할 상황에 이른다.삼국간섭 소식이 조선에 전해진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삼국간섭을 전후하여 인아거일의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쪽은 조선만 고려한다면 고종과 왕비였지만 일본에 의해 권위가 추락하여 궁중에 연금된 것과 다름없던 상태에서 단독으로 반일정책을 구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의 움직임인데, 당시 주한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이 삼국간섭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일본공사에 대한 견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일전쟁 중 일본이 한국에서 배타적으로 이권을 독점해 가자 국간섭의 호기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통해 이노우에의 한국내정 장악기도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청일전쟁이후 청이 한반도에서 밀려나자 왕비는 청국을 대신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기도를 막고자 했다. 이 상황에서 당시의 일본이 차선의 해결책으로 택한 것이 왕비시해사건이었다. 삼국간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 갈등이 왕비시해로 귀결된 것이다.왕비시해사건 당시 현지에서 이를 직접 지휘한 것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였다. 따라서 왕비시해사건의 발단은 먼저 미우라가 주한 공사로 부임한 배경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미우라가 주한공사로 임명된 과정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가 관련되어 있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무단적 선장’, ‘혜안이자 과감한’, ‘급진파의 대표격’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던 군인출신의 과격한 인물인 미우라를 주한 공사를 임명하면서 삼국간섭 이후 일본 내외 정국의 불안과 위기를 맞은 조선문제의 활로를 모색하려 했던 것 같다.삼국간섭 이후 한국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극복하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모색해 왔고, 러시아 또한 한반도내에서의 일본세력 배제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해 간 핵심인물이 바로 왕비였고, 일본정보에게는 왕비가 과거 20여년 동안 화근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한국 내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던 일본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래 청국에게 제동이 걸린 것도, 청일 전쟁 이후 한국의 내정을 장학하려는 일본의 기도가 러시아 공사의 개입에 의해 저지당할 상황을 맞게 된 것도 모두 왕비와 관련된 것이었다.당시 일본정부에서는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차단하자는 것과 점진적인 정책으로 우회적인 수단에 의해 같은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라는 두 방향의 대조선정책이 논의되었지만, 두 번째 안은 이노우에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고 실패로 그치고 만다. 당시 일본정부의 입장은 “만일 종래처럼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러시아의 방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중단한다면 일청전쟁은 전혀 그 의의를 상실하는 동시에 원된 공관원, 일본군 수비대, 영사경찰, 장사패, 신문기자 등의 규모와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아무런 배후의 지원없이 그 혼자서 결행했다고 보기는 힘든 일이며, 따라서 관심은 당연히 이노우에에게 집중된다.왕비시해를 전후한 시기에 이노우에의 행적에는 많은 의문점이 드러난다.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결과가 불확실한 기증금 제공을 왕실에 공언하며, 왕실에 대한 회유와 왕과 왕비의 경계심 완화를 꾀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후 이노우에는 9월 1일 부임한 미우라와 17일 간이나 함께 지내면서 왕비시해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우라는 이노우에의 하수인일 뿐, 사태의 전모가 드러날 경우 그는 책임을 덮어쓰고 할복자살이라도 해야 할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이러한 추증은 사건 직후 조선주재 외국대표들과 서양의 신문들로부터 이노우에가 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이노우에가 실제의 주모자였으며, 미우라는 단지 희생양에 불과하다. 박영효의 반역음모사건도 이노우에게 의해 사주된 것이고...... 두 사건 모두가 이노우에가 잠시 조선을 떠나 있는 사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과 왕비시해의 현장일본공사의 지시에 따라 스기무라, 오카모토 등은 일본군대와 경찰을 동원, 훈련대를 궐문 앞까지 끌어오고, 대원군과 이재면을 궁궐 안으로 옹위해왔다.여기서 중요한 의문은 당시 대원군의 입궐이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왕비시해 전 일본측은 대원군과 몇가지 약조를 맺는다. 이는 ①대원군은 국왕을 보익하여 궁중을 감독하되, 일체의 정무는 내각에 맡기고 결코 간섭하지 말 것, ②김홍집?어윤중?김윤식 3인을 중심으로 정부를 개조, 개혁을 단행토록 할 것, ③이재면을 궁내부대신, 김종한을 궁내부 협판으로 할 것, ④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에 유학시킬 것이라는 약조이다. 하지만 과연 대원군이 궁궐을 공격하여 왕비만을 시해하고 자신은 누명만 쓴 채 권좌에서 배제되는 일에 동의했을까? 또한 대원군과 일본의 관본인이 있었다. 또 이곳에는 40여명의 조선군 훈련대가 무기를 내려놓은 채 정렬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들이 실제 훈련대의 군인이었다면 사건 직후의 책임을 뒤집어 쓰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군인을 제외한 일본인들은 곧바로 왕과 왕비의 처소로 가서 왕과 왕태자의 측근 인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비의 침실로 향하였다.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지만, 이미 일본인들이 들이닥친 이후였고, 왕비를 막아선 이경직은 살해당했다.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들에 의해 수차례 가슴을 짓밟히고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그들은 실수가 없도록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도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붙잡혀 옷이 찢겼고, 왕태자는 상투를 잡아 채이고 칼등으로 목을 맞아 기절한다. 이때 고종은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들을 목격하는데, 고종은 사건 이후 용의자로 오카스토, 스즈키, 와타나베 등 20여명의 낭인들이라고 직접 이름을 거명하기도 한다.왕비시해 후 살해자들은 의녀와 궁녀를 통해 왕비의 얼굴을 확인하고 건청궁 뒤편의 녹산 남쪽으로 왕비의 시신을 가져가 시신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타고 남은 재를 일부 땅에 묻고는, 나머지 잔해를 바로 옆의 향원지에 버렸다. 이는 왕비의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열국의 대응사건 직후 열국외교관들은 왕비시해에 대한 진상이 내외에 폭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사건을 위장처리 하려던 미우라와 이에 영합한 일본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사태의 진실을 간파하고 즉각 대응하였다. 특히 러시아공사 웨베르는 일본공사에게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는데, 이는 고종 및 왕비와의 친분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러시아의 대조선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측은 왕비제거 이후 사건당일 친일내각을 조직, 조선내 반일세력을 축출하고 있었다. 이것은 친러세력의 제거였을 뿐 아니라 한국의 현상유지라는 러시아 방침을 정면으로 뒤엎는 행위였인이다.
스포츠와 여성여성 스포츠의 굴레를 벗겨라!지난 3월 17일 열린 아테네올림픽의 축구 아시아 예선 이란과의 경기가 열린 테헤란 아자디스 스타디움에는 문을 연 이래 최초로 여성의 응원소리가 들렸다. 이슬람 국가에서 남여가 하나의 열린 공간에서 마주대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슬람권에서 여성이 갖는 위치를 우리는 흔히 이슬람 세계만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과연 그러한가? 당신들의 스타디움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경기장에서 땀 흘리는 여성에게서 포르노그라피의 미학을 찾는 자가 당신은 아닌가?여성 스포츠에 대한 편견의 근원고대를 거슬러 올랐다 근대까지 내려오는 동안 스포츠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언제나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킨 쿠베르탱은 “여자들의 운동 활동은 자연계의 법칙에 어긋나며 경기의 엄숙함을 해친다.”며 여성의 스포츠 참여를 반대하였다. 여성은 승리한 남성에 대한 환호와 열광 속에서 보상의 수단으로 평가한 것이다. 19세기 말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와 함께 발달한 근대 스포츠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찾을 수 없다. 여성노동력의 등장과 남성적 지배의 약화에 따른 심리적 불안감은 경쟁지향적 스포츠의 발달을 가중시켰고, 힘?공격성?용기의 실현을 강조하는 스포츠는 남성에게 ‘그들만의 세상’으로 인식되었고 그 허용범위 또한 남성에게 집중되었다.여성이 스포츠 세계에 등장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사회의 인식변화가 있어야 했다. 최초로 여성이 공식적인 스포츠 행사에 참가한 것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에서 골프와 테니스 2개 종목에서였다. 그 이후 조금씩 여성의 스포츠 활동은 증가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사회의 여성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남성들의 부속물로 보는 경향이 남아있다는 것이다.“창조주는 남성에게는 육체의 힘과 용맹을 주었고 여성에게는 약하고 섬세한 육체를 주었다.”아리스토텔레스여성의 신체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고대로 거슬러 오른다.스포츠 사회에서의 여성 스포츠세계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시장경쟁논리 속에서 스포츠가 예외가 될 수 없다. 프로축구나 농구, 야구, 골프, 테니스 등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빠져있는 프로스포츠는 제쳐두고라도 거의 모든 스포츠가 이윤을 남겨야하는 오락 산업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마추어리즘의 장이라고 하는 올림픽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자본논리의 스포츠에서도, 프로스포츠를 중심으로 한 오락 산업에서도 역시 그 중심에는 남성이 서 있고 그 속에서 여성 스포츠의 모습을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여자프로농구, 여자배구도 있다고 항변할 것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니 주류는 아니더라도 그 동류까지를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스포츠신문, 스포츠뉴스 어느 한 곳에서도 여성 스포츠가 top이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은 없었다. 박세리, 박지은의 미 LPGA 메이저대회 우승이나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정도에 버금가는, 흔히 말하는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여성 스포츠 소식은 뒷전에 머무르고 있다.20세기 여성이 스포츠 영역에 진출한 이후 여성 스포츠의 양적 확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올림픽에서 드러난 남여의 스포츠 참여에 대한 수치는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여전히 여성 스포츠의 위치는 남성 스포츠의 종속적 위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상당수의 여성 스포츠는 관중- 대부분 남성 -의 성적 눈요기 이상의 위치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운동 경기에서 상당수 남성들의 시선은 선수의 유니폼을 벗겨놓는다.포르노그라피로의 여성 스포츠남성의 경기와는 달리 여성의 운동 경기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선수의 기량과 투지, 팀의 작전 따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수의 몸매나 미모를 우선시 한다. 몇 해 전 국제배구연맹은 침체된 여자배구의 인기를 되살린다는 취지로 “어깨와 히프의 상당 부분이 드러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여야 한다.”는 규정을 각 국에 통보했다. 비록 여론과 선수의 반발로 국제배구연맹이 두 손을 들었지만 스포츠 정책가들에게 여성 스포츠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런 모습은 여자프로농구에서도 볼 수 있다. 한때 여자프로농구에서도 다양한 볼거리 제공이라는 목적으로 선수들에게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혀놓았다. 성공하였는가? 요즘처럼 성인물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들의 시각으로는 평균이하의 여자들이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려고 그곳을 찾는다는 발상을 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결과는 여자프로농구가 열리는 경기장 관중석의 모습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구?농구선수의 몸매가 잘 빠지면 얼마나 잘 빠졌단 말인가? 여성의 몸에서 예술성을 발견하려거든 갤러리를 찾아라. 여성의 몸에서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려 한다면 인터넷 성인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전두환의 3S정책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국민주권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인 demokratia이다. demokratia란 말은 demos(인민, 민중, 주민)와 kratia(지배, 통치, 권력)의 합성어이므로 demokratia는 인민의 지배, 인민의 통치, 인민의 권력을 뜻하는 말이다. 인민의 지배란 국가권력을 한 사람이 가지는 군주정치와 소수가 지배하는 귀족정치와 구별되는 정치형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국가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형태이다.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결코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정의에서 ‘of the people’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표명하여 민주주의의 근원을 나타내었다.근대 시민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불합리한 봉건적 제도와 절대군주권력을 약화, 제한, 타도하려는 투쟁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원리들이 확립되어 갔다. 왕권신수설 내지 군주주권론에 대항하여 국민주권을 외침으로써 국가권력의 원동력이 모든 국민으로부터 유래함을 역설하였다.주권이란 개념은 국가권력 내지 통치권을 의미하는 경우와 국가권력의 성질, 즉 대내적 최고성과 대외적 독립성을 뜻하는 경우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국민주권론은 이와 같은 국가주권의 원동력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있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알투지우스는 인민상호간의 (사회)계약과 인민과 지배자간의 (통치)계약, 즉 이중계약을 설명하면서 주권이 전체로서의 인민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인민주권론을 주장하였고, 이는 사회계약에 의하여 국가권력의 기초를 설명한 루소의 사회계약설에 의해 완성되었다.1. 주권의 행사현대민주국가는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정치기능 수행은 그 대부분은 국민의 대표자에게 위임된다. 국민의 주권행사가 실질적으로 그들의 대표자에게 위임된다 하더라도 국민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결정권을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어느 기간에 위임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경우, 국민이 주권 소유자라 할 수 있다.2. 국민(인민)의 개념 구체적 내용국민이라 할 때 법적 의미로 국가의 인적 요소를 가리키고 인민은 자연적 사회학적 느낌을 풍기는 말로 사회의 구성원을 뜻한다. 국민은 시민계급이나 무산자계급과 같은 특정의 계급이 아닌 국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과 사회집단 사이에 특정한 관계, 즉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지는 동시에 사회로부터 일정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따라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의 자격요건은 그가 국가사회에 대해서 법규의 준수와 충성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능력과 의사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국가사회가 판단함에 따라 결정된다. 오늘날 민주국가에 있어서의 주권자로서의 국민의 자격은 일정한 공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사를 표준으로 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권력분립권력분립이란 국가권력의 작용을 입법, 행정 및 사법의 셋으로 분리?독립시켜 각각 입법부, 행정부 및 사법부의 독립된 기관에 속하게 하며, 그들 상호간에 견제와 균형의 원칙으로 국가기관이 권력을 행사케 하려는 제도이다. 권력분립론은 중세 봉건제도를 극복하여 민족통일국가를 형성한 근대 초기의 절대주의적 군주의 전제정치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전개된 주장이다.정부의 조직형태는 사회의 통합관리라는 관점에서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정부조직의 극단적인 일원화는 전제정치 내지 독재정치를 초래하여 그 자체가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될 것이다. 실제로 정부조직의 극단적인 일원화가 전제적 또는 독재적으로 된 실례를 정치사가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권력분립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근대국가의 권력구성 원리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은 로크와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이다.로크는 그의 시민정부이론에서 이권분립론을 주장하였다. 첫째는 입법권인데, 이것은 국민의 생명, 자유 및 재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어떻게 국가의 권력이 행사되어야 할 것인가를 정한다. 둘째는 집행권인데 이것은 국내의 실정법 집행을 확보하는 권력이다. 외국에 대해서는 전쟁, 평화 및 조약체결에 관한 동맹권이라 부르는 제3의 권력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집행권과 동맹권을 구별하지만 양자의 분립을 주장하지 않으며, 입법권을 최고권으로 규정하여 입법부가 상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에서의 의회중심의 정치, 즉 영국의 의원내각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몽테스키외는 3권분립제를 주장하였다. 권력을 장악하는 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국가의 권력은 입법권, 집행권 및 사법권의 셋으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3권분립제가 채택되어질 경우 3권의 붕립과 상호견제로써 국민의 자유가 보장되어 전제정치의 출현이 저지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3권분립론은 미국 연방정부의 권력구조에 큰 영향을 미쳐 대통령 중심제를 가져왔다.※ 고전적 권력분립론에 대한 비판1. 이론적으로 3권 중 입법권이 우위를 차지함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법에 의한 행정이라든가 죄형법정주의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행정?사법부는 입법부가 정해준 법률에 복종해야 하므로 3권이 대등한 것이 아니라 입법부가 다른 2부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2. 현대 복지국가에서 3권 중 행정부 권한이 강화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권력분립의 입장에서 보면 행정권의 지나친 강화는 승인 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행정권의 확대?강화가 요청되고 있다.4. 사법부에 위헌 심사권이 인정되고 있는 경우에는 사법부가 다른 2부보다 성위에 서게 된다.따라서 현실적으로 3권이 대등한 경우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 3권이 각각 우위성을 차지한다.의회주의의회는 국민주권 원칙과 대의제도 원칙에 입각하여 국가의 규범체계와 주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추인하면서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독함으로써 민주정치 이념과 원리를 구현하는데 그 존재 의의를 두고 있다.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대의원치과 다수결 원칙에 따라 고유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민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치형식이 바로 의회주의인데, 이러한 의회주의는 정당 및 행정부와의 관계에 따라 정당국가적 의회주의와 행정국가적 의회주의로 구분되기도 한다.
권력분립1. 권력분립 원리의 개념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입법권·집행권·사법권으로 분할하고 이들 권력을 각각 분리·독립된 별개의 국가기관들에 분산시킴으로써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에게 국가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함은 물론 권력상호간에 권력적 균형관계가 유지되도록 하는 통치구조의 구성원리.2. 권력분립 원리의 본질(1) 자유주의적 원리 :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 권력에 대한 불신을 기초로 하는 원리(2) 소극적 원리 : 권력의 집중·남용의 방지, 적극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효율성을 극 대화시키기 위한 원리가 아니다.3. 권력분립 원리의 위기(1) 집행부 강화현상의 일반화- 냉전체제와 비상사태의 만성화 : 방위기구의 확대·강화- 사회국가이념의 실현과 경제위기 극복의 필요성- 행정입법의 증대와 처분적 법률의 증가(2) 정당정치의 발달 : 권력통합현상권력분립의 핵심은 입법권과 집행권의 분할, 분산에 있다. 그런데 현대 국가에서는 정당정치의 발달로 입법권이건 집행권이건 사실상 동일정당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집행권 수반의 소속 정당이 입법권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입법권의 상당부분은 집행권과 일체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정당을 통하여 입법권과 집행권이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고전적 권력분립의 의미는 퇴색된다.(3) 현대적 독재제의 출현 : 군사독재, 개발독재군사정부나 민간정부라 하더라도 전 국민의 이름을 내걸고 독재를 행하는 현상이 특히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이를 국가들은 선진국들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극도로 낙후된 상태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을 꾀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경제개발이 국가의 최우선적 목표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고 이를 위하여 효율적인 국정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국가권력을 집행권에 집중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4) 헌법재판제도의 발달 : 사법국가화한편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헌법재판제도와 법원의 위헌법률심사제도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사법부가 무효화시킬 수 있는 이른바 사법국가화를 가져와 또다른 의미의 국가권력통합현상을 낳고 있다. 특히 사법심사제는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사법권에 의하여 가장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입법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4. 권력분립 원리의 재구성(1) 권력분립 원리의 현실① 자율적 상호방임 현상예컨대,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입법권을 행사하고, 입법부나 집행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법원이 사법권을 행사하며, 세 개의 권력이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유지한다고 하자(정당을 통한 통합 등은 상정하지 않기로 한다). 즉 권력분립의 원리가 철저히 관철된 권력구조를 상정하자. 이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의 하나는 자율적 상호 방임이다. 이는 흔히 법원의 판결에서 잘 드러나는데, 입법부의 "입법형성권" 또는 "입법재량권"이라든가, "사법부 자제론"이라든가, "통치행위론"이라든가 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법률이건, 행정처분이건 그로 인한 인권의 침해는 분명히 발생했는데도 권력분립의 이름을 빌어 이에 대한 견제나 통제를 사실상 회피하는 현상이 생겨난다.간단하게 말한다면, 국가권력은 집중되어 있지 않지만, 국가권력은 여전히 남용되고 이로 인해 인권은 부단히 침해당한다. 권력분립의 원리는 권력집중으로부터 인권의 보호를 위하여 마련된 장치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권침해를 사후 방조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분립된 권력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통제도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② 국가권력의 단일화 현상나아가 보다 현실적으로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국가권력은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나라건, 어떤 정부형태를 취하는 나라이건 정당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사실상 입법부와 집행부는 통합되어 있다. 의회 다수당의 당수가 집행부(내각)의 수반이 되는 의원내각제를 취하는 나라는 그 전형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제를 취한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대개 최고법원의 구성원은 집행부 수반이 임명하거나 의회에서 지명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어느 방식을 취하건 사법부 역시 입법부나 집행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국가권력은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인권의 주체인 국민의 관점에서는 더욱 타당성을 가진다.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권력의 통합현상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현직 대통령이 의회 다수당의 총재를 겸하고 있다는 현상적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집행부(대통령)의 법률안 제출권이 헌법적으로 보장될 뿐 아니라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긴급명령선포권을 가지고 있어 입법권은 사실상 집행부가 장악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자신이 지배하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임명하며, 헌법재판소장을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경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인씩을 지명하지만 국회와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지배하고 있다. 즉 한국의 경우 입법권은 국회에, 집행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는 헌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통합현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대통령을 가리켜 "최고통치권자"라고 하는 것은 그 표현의 전근대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