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했고 개경은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등의 공으로 수복되었다. 그런데 개경 수복 직후 가장 큰 공을 세운 정세운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세 명 ... 과 10년에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입이 발생하면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정세운 살해 사건, 흥왕사의 변란은 공민왕의 상황을 급변시켰다.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난 ... 의 원수에 의해 시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정세운과 관계가 좋지 않은 김용이 조작한 왕명으로 그를 살해하게 한 것이다. 이들 세 명은 모두 국문을 통해 사건의 전말
(逃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진치고 정세운(鄭世雲)이 독촉하여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여러 장수가 서울을 포위하매 정세운(鄭世雲)은 물러나와 두솔원 ... 를 올렸고 거듭된 疏에 玉堂이 上箚 請罪하였다. 다음해 정해년 여름에 다시 萬言疏를 올렸다. 이어서 鄭汝立의 凶悖를 論하였다. 방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去官하고 沃川으로 退去하였다. 倭 ... 하여 萬言疏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三司가 交章請竄하여 결국 吉州嶺東驛에 流配되었다. 이해 11月에 命放되었는데 10월에 鄭汝立事件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때 禮曹正郞으로 薦擧한 吏曹判書洪
는 격분하였다. 또 신돈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면서 여기에 제동을 걸려는 반대세력의 저항도 있었다. 이승경(李承慶)은 신돈에게 ‘나라를 어지럽힐 중놈’이라고 하였으며 정세운(鄭世雲 ...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의 지인(知人)들-신돈의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1 . 머리말2 . 혈연관계3 . 집권 후의 지인(知人)들4 . 인간관계를 통해서 본 신돈의 몰락 이유5
계묘일에는 원에서 직접 哈剌那海, 伯顔帖木兒, 林蒙古不花 등 사진을 파견해 고려의 류탁, 염제신, 權謙, 元顥, 羅英傑, 印?, 金鏞, 李權, 康允忠, 鄭世雲, 黃裳, 崔瑩, 崔雲起 ... 윤충, 정세운, 황상, 최영, 이방실, 안우 등 8명뿐이다. 그리고 최운해 열전에 그의 아버지 崔祿이 고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우성 전투에 참전했던 이들이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