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선생의 예견과 경고, 문묘배향
- 최초 등록일
- 2010.05.18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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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의병장으로만 알려진 중봉 조헌 선생이 왜 문묘에 배향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선생의 통찰력과 애국심,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책을 설명하고, 학문의 깊이가 담겨있는 상소일람을 요약하였습니다. 선생의 선조에 대한 설명을 수록하였습니다.
목차
Ⅰ. 文廟配享事由
Ⅱ. 先見之明과 衷情에서 나온 警告
1. 임진왜란에 대한 예측
2. 逸話
Ⅲ. 學問이 表出된 上疏一覽
Ⅳ. 修學·官歷
1. 名門家 출신이 忠節의 源泉
2. 官職進出 및 官歷
Ⅴ. 文廟配享 실록기록
Ⅵ. 文烈公贈領議政趙憲先生 집안 來歷
본문내용
重峰趙憲先生(1544-1592,49歲殉節)은 우리가 잘 안다고 하는데 대개는 義兵將重峰趙憲先生은 1592年(宣祖25壬辰)8月18日 錦山戰鬪에서 鳥銃으로 무장한 倭賊과 싸우다가 一軍700義士와 함께 殉節하신 어른이다라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重峰趙憲先生의 諡號가 왜 文烈公인지 왜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는지 왜 文廟에 配享되어 우리나라 18賢, 즉 先生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선생의 학문이 워낙 뛰어나서 그 忠節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선생의 뛰어난 그 학문은 미구에 닥칠 앞날과 앞일을 훤하게 내다보는 힘이 되었고, 또 주저 없이 국가 지도층에 危險과 警告를 연발한 내용들을 적고자한다.
Ⅰ. 文廟配享事由
重峰趙憲先生은 愼獨齋金集先生(1574-1656, 83歲卒逝, 文廟配享된 沙溪金長生先生 아들)과 함께 1883高宗20年11月20日에 領議政에 증직되고 文廟에 배향되었다. 藝文館提學韓章錫(吏曹判書, 大提學 역임 , 1832-1894, 63歲卒, 鳳棲兪莘煥門人)이 지은 敎文을 잠시 인용하기로 한다. 前略
“큰 유학자로서 함께 빛나는 업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300년 동안을 지나도록 문묘에 배향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옛날의 어진 선비인 文烈公趙憲은 학문에서는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환히 꿰뚫었고, 기운은 큰 강이나 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 효성은 明나라를 감동시켰고 충성은 쇠나 돌보다도 견고하였으며, 행동은 반드시 五倫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자신은 시골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朝廷(國家)에 돌려 三代 시기의 정사를 이룩하는데 뜻을 두었다.
栗谷(李珥先生1536-1584 .49歲卒逝)과 牛溪(成渾先生, 1535-1598, 64歲卒逝)의 정통파로서 도를 직접 받았으니, 문장은 넓게 배웠고 예법으로 절제하는데 독신하였으며, 先見之明은 언제나 같이 부합되어 간사한 것을 분간하고 난관을 막는 이치에 환히 밝았다. 唐堯나 禹舜의 도리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보좌한 특출한 공적이 있었고, 孔子나 朱子의 학문을 따라 나아갔으니 그 도를 맡아 나서는데 용감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