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로서 오랫동안 교과서 편찬을 주도했다. 오다의 정책구상은 교과서 편찬정책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그는 경성제대의 창설을 준비했으며, 경성제대에서 예과 부장과 법문학 ... 부 교수로 재임하여 조선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경성제대 교수들을 대표해서 총독부 식민정책의 추종하고 식민정책의 대변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통해 오 ... 학회를 계승한 단체로 추정되기도 한다. 경성독사회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들과 조선사편수회 회원들이 주체가 되었고, 경성부의 학교 교사들이 회원으로 참석하였다.3. 1930년대
었다.또 신흥 은 논문을 사회과학, 철학, 조선연구 순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러한 학술의 배열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것이기도 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는 학과와 전공 및 강좌의 순서 ... 이 다양한 정체성의 소유자인만큼 여러 학문 분과, 문학·정치학·법학·사학 등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중에서 최근 연구를 살펴보자면 먼저 본고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은 정종현 ... 의 ‘확호한 이론-과학적 근거’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였다.이전의 1910년대 조선에서 ‘과학’이라는 말의 사용은 첫째는 ‘학(學)’의 동의어로서 ‘조직된 지식’의 의미이고 둘째
리영희 선생의 삶을 살펴보자.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관 대관 영림서에서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마치고 경성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 해양대학 ... 하여 1957년까지 7년이라는 세월을 복무하며 미군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제대 이후 합동통신사에 취직하여 외신부 기자로써 활동하게 되고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신문대학원 ... 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맡아 강의하셨다. 이후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후 1999년까지 동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을 맡으셨으며 현재 중앙대
에 미치는 효과는 매우 컸다. 한국사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연구나 교육은 원천적으로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한편 1924년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이하 경성제대 ... )은 이른바 아카데미즘 식민사학의 본산으로 군림하면서 조선사편수회와 상호보완적으로 식민사관을 심화시켜나갔다. 즉 조선사편수회는 기초자료의 정리·제공이라는 기능을 담당하고 경성제대는 이 ... 를 근간으로 구체적인 식민사학적 학문성과를 양산해내는 두 개의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경성제대의 한국사 연구 및 서술의 본질은 사회경제사연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3?1운동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