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 (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三國志》에 인용된 《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 ... 지만, 최근 우리나라 학계에서 ‘위설’로 부정되어 왔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기자’라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기후(箕侯)’·‘기(箕)’ 등
과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즉, 기자국의 통치자를 '朝鮮侯 기자', '조선에 있는 제후인 기자'(이렇게 해석함에 무리는 없으리라)라고 일컫게 된다.3. 기자 속국론고조선에 관한 우리 ... )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 ... 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