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호적제도
- 최초 등록일
- 2003.11.27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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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 서 론
Ⅱ . 본 론
1 . 호적의 역사
2 . 호적제도의 운용
3 . 조선시대 호적 작성 절차
4 . 호구파악의 보조 수단
5 . 호적의 기재 내용
6 . 호적의 용도와 기능
Ⅲ . 결 론
본문내용
Ⅱ . 본 론
1 . 호적의 역사
국가에서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호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도입되어 작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도래된 호구파악 문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라장적’이다. 신라장적은 신라촌락문서라고도 한다.
고려시기에도 족보에 수록된 호적 자료를 통하여 그 시기에도 국가의 인민 파악과 직역의 구별이 엄격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국가제도의 정비에 따라 호적제도도 더욱 엄격하게 정비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기의 호적기재 방식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호처(戶妻), 병산(幷産), 모(母), 외조(外祖), 본곤(本貫) 등의 기재 방식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부계와 모계의 양측적 친속관계가 조선시기에 들어와서 부계친을 중심으로한 친족관계로 호적기재의 형식에서도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호구 파악을 위한 호적제도의 보조적 제도는 인보정장제, 오가작통제, 호패제 등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1711년 이정법의 실시는 이정(里正)을 중심으로 한 부역의 촌락 공동책임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자영소농의 성장에 따른 촌락의 발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적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는 호적파악의 이완현상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조산후기의 호구 파악의 수준은 실제 인구의 40% 정도로 매우 불완전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 자료
·조선시대 생활사 / 한국고문서학회 / 역사비평사 / 1996년